통일과나눔 아카이브 8000만

전체메뉴

학술

  • HOME
  • 논문
  • 학술

한국전쟁기 부역 이데올로기의 전환: 부일(附日)과 부공(附共)의 교차점에서

The Transition of Collaborationism Ideology during the Korean War: At the Intersection of Pro-Communists and Pro-Japanese

상세내역
저자 김지형
소속 및 직함 서원대학교
발행기관 5.18연구소
학술지 민주주의와 인권
권호사항 17(1)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79-109
발행 시기 2017년
키워드 #반공   #반민법   #부역법   #우익   #한국전쟁   #김지형
원문보기
상세내역
초록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민족 구성원들에게 공통의 적은 일제였고, 그에 부역한 친일파들은 곧 민족 반역자였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과 대적하는 와중에 북한에 부역한 사람들을 새로운 반역자, 곧 공산 부역자인 부공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 점에서 한국전쟁은 공공의 적에 해당하는 표상이 친일 부역자에서 공산 부역자로 대체되는 계기였다. 법적 규범 또한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법이 아니라 제2대 국회가 제정한 부역법이 작동하였다. 반민법에서 규정한 부역죄는 민족적 가치가 기준이었으나 부역법에서의 부역죄는 이데올로기, 체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하였다. 전시 하에서 이같은 사회적 분위기는 부역법과 반민법의 교차를 초래하였다. 부역법 제정과 반민법 폐지 현상이 한국전쟁기 부역자 처벌과정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반민법이 폐지됨에 따라 친일파를 단죄할 법적 장치 또한 제거되었다. 대신 부역법의 제정으로 부역자는 오롯이 북한 협력자로 단일화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친일세력은 사회적 지탄과 단죄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친일파 아닌 반공주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다. 특히 친일 부역자들은 반공주의자를 자임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부역 이데올로기의 변용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선거라는 합법적, 공식적 정치의 장을 경유하여 반공-우익 정치인으로서 재탄생하였다. 부역법 제정과 반민법 폐기라는 교차 국면의 귀결은 반공-우익의 복권이자 전후 사회의 재패였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