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백석의 동시와 그의 일부 동시 작품을 계기로 촉발된 ‘아동문학 논쟁’, 그리고 현지파견 이후의 백석의 동시에 관한 것이다. 한동안 번역에 주력했던 백석은 1956년 이후 다수의 동시를 발표했다. 그의 동시는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학령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시에도 계급적 교양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면서 일부 작품은 교양성을 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백석은 학령 전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아동문학에서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바탕 위에서만 참다운 사상성과 교양성이 우러나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문단의 분위기는 학령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시에서도 인식과 교양은 분리될 수 없으며, 전자보다 후자가 더욱 중요하다는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그것은 김일성 유일지도체계의 구축과 천리마 운동으로 이어지는 북한 사회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였다. 아동들을 수령과 체제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충직한 전사로 키워내려는 의도가 학령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문학에서도 사상성과 교양성을 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석의 동시에 내재된 교양적인 측면과 그 가치는 전혀 평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백석이 삼수로 현지 파견된 것은 새 시대의 개막을 앞두고 작가, 시인들에 대한 사상의 고삐를 죄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데 따른 것이었다. 그 후 얼마동안 백석은 현지 체험을 바탕으로 날로 변해가는 산촌과 농민들의 삶, 그리고 활기찬 농장 모습을 그린 생동감 넘치는 시와 동시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백석도 창작에 시대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62년을 전후해서는 선전, 선동적인 성격이 강한 동시와 시를 발표했지만 이 몇 편의 작품을 끝으로 그의 작품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백석이 스스로 창작을 포기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노골적인 선전, 선동의 문학을 강요하는 억압적이고 경직된 분위기가 한 뛰어난 시인으로 하여금 붓을 꺾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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