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50년 소련의 적극적 지원과 중국의 동의 하에 6?25 전쟁을 도발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김일성은 10월 1일 소련과 중국에 긴급 구원을 요청하였고 중국은 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건국 초기의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수차례의 참전 결정과 번복을 거듭하다가 10월 18일 최종적으로 참전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중·북 양국군의 일원화된 작전지휘를 위한 연합사 구성은 12월 8일에 성립될 정도로 상당히 지연되었다. 그 원인은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활동간 중국공산당과 중국인의 반한 행위 등에서 경험한 뿌리깊은 역사적 불신감, 북한 주권에 대한 지나친 침해와 내정 간섭 우려, 작전지휘권의 상실이 가져올 연안파 등 반대파들의 득세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소련의 대북 영향력 유지 정책과 북한의 대소 일변도 정책, 이에 따른 중국의 소외라는 구조적 요인 등을 들 수 있다. 북·중 간 연합사 구성을 둘러싼 갈등은 초기 북·중 관계를 악화시켰고 북한군이 유엔군 후방지역에서의 제2전선 활동이라는 보조적 역할로 전락하였으며, 역설적으로 김일성은 군권을 상실했지만 당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여 연안파와 소련파를 제거하고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기회를 획득하였다. 우리는 중조연합사 구성과정을 통해서 강대국과의 연합사 구성시 약소국은 심각한 주권의 침해를 경험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향후 안보정책 추진시 강력한 군사력의 건설을 통해 자주적 안보능력 및 전략적 가치를 제고하고, 대중?북 정책 추진시 양국 간의 역사적 불신감과 국가이익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을 잘 공략해야 하며, 무분별한 신뢰에 기반한 친중 정책 보다는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보다 균형적이고 현실적인 외교전략을 구사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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