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와 윤이상의 사회』는 전체가 3부이다. 이 부분은 마지막 제3부에 해당하는데, 앞의 제1, 제2부를 해석하고 종합한다. 난파와 윤이상의 살았던 이십세기 한국의 국가변화가 첫머리에 다뤄진다. 조선왕조 멸망 이후 나타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 그리고 남북 분단국이 이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논의된다. 난파와 윤이상은 국가적 배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개인이 감당하기 힘겨운 대립적 정치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그 결과 변절이라는 평가에 내몰린 삶을 살았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점령되어 상실된 지경에서 ‘민족’ 개념이 한반도인들의 사고에서 구심점으로 등장한다. 이 개념은 20세기를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음악적 논의도 이 개념의 영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20세기 말 무렵, 남한의 사회적 논의에서 난파는 친일파로, 윤이상은 친북파로 비판된다. 난파와 윤이상은 개인적 열정으로 서양음악을 서양에 가서 공부했다. 이는 정치와 무관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애국심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난파의 경우 생의 말에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윤이상의 경우 동베를린 사건의 정치적 고통을 경험하며 남한과 멀어진다. 그 대신 남북의 통일을 위해 북한과 협력한다. 두 음악가는 그들 각각의 변절이라는 지탄이 남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악은 살아있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판정과는 별개로 그들의 음악이 살아있음을 이 글은 긍정하고 좋게 평가한다. 왕조시대의 임금에 대한 충성개념을 현대적 민주국가에 사는 개인의 전체 삶에 적용시키는 과도함은 피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의 권위에 의해 고착된 의견을 강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보다는 결점이 있는 개인의 자유도 긍정되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난파와 윤이상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 글의 뒷생각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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