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차세계대전 후 중국은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국공내전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개전되는 1950년까지 사상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였고, 국내의 분위기를 바꿀만한 일대의 사건이 필요했다.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본토 밖에서 일어나는 이념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중국공산당 측에서는 국제주의시각에서 같은 형제국을 돕는 것이었고, 중국 내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정돈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결국, 이 한국전쟁은 ‘전시경제체제의 부활을 이용한 대중동원’으로 중국이 난계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이미 이전부터 대중동원으로 여러 난국을 이겨낸 마오쩌둥은 ‘항미원조’라는 대외적인 슬로건 아래 국내 대중동원 운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국민당 자유주의 진영의 사상을 제거하기 위해 시사선전운동을 통해 의식을 개조하고, 각성한 군중이 자발적으로 대중동원운동, 애국공약운동에 참여하게 독려하였다. 결과적으로 ‘항미원조’운동을 북·중관계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항미원조운동 중 ‘지원’의 개념에서는 중국과 북한 사이의 원조관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상해 등 중국본토 내에서 행해진 ‘항미원조’운동은 북·중관계의 맥락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엄연히 ‘항미원조’의 명제 하에 진행된 운동이었지만, 그 초점이 ‘원조’ 보다는 ‘항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항미원조'운동은 한국전쟁 시기 북한에게 병력적으로나 물적으로나 도움을 준 동원운동이었지만, 하지만 실제 이해득실을 따져보면 시사선전운동은 중국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을 다지는 수단이었다. '항미원조'운동이라는 명목 하에 신생국의 대중에게 ‘철저한 사상적 교육’을 감행한 것이었고, 이러한 중국공산당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대중동원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대중동원을 통한 무기헌납운동과 애국공약운동은 중국군의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나아가 전시경제체제하에서 애국심을 기반으로 한 절약운동, 증산운동은 이들의 경제력 또한 급상승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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