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상자료의 사료적 가치에 주목해서 해방과 분단의 사회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주목했던 분석 대상은 영상자료에서도 ‘해외 기록영화’이다. 미군정기 국내의 영상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해외의 기록영화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기록영화는 시각자료이자 1차 사료의 성격을 갖는다. 기록영화는 역사 현장의 모습을 직접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기록영화를 비롯한 영상이미지는 목적을 가지고 촬영되었다. 영상기록이 당시의 시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성도 있지만, 일상의 사건과 삶의 모습을 이미지로 기록했던 영상물은 촬영 당시의 기획자의 의도가 가미된 편집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공보부라는 민간영역 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도 많은 영상물을 생산했다. 미군 육군통신대는 미군 진주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한국의 정치ㆍ사회적 상황을 촬영했다. 공보부 제작 영상들이 많이 소실된 것에 비해 미군이 생산한 영상들은 많은 분량이 현재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남아있다. 그리고 NARA는 한국전쟁 시기 미군이 노획한 북한의 기록영화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 글은 미국과 소련, 남한과 북한 등 촬영 주체가 다른 기록영화를 서로 견주어 보면서 해방과 분단의 남북한 사회상과 미ㆍ소의 이미지 전략을 살펴보고자 했다. 38도선을 경계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기 위한 명목으로 진주한 미국과 소련은 냉전으로 변모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본격적인 세력 경쟁을 한반도에서 구현하기 시작했다. 자국의 정책과 문화 논리를 영상을 통해서도 파급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도 소련도 북한도 남한도 마찬가지였다. 문맹인구가 아직은 다수인 나라에서 논픽션의 진정성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었던 것이다. 미소 양국의 세력 경쟁은 결국 분단으로 귀결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국에게 유리한 선전과 이미지를 위한 문화적 경쟁 또한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남한은 미군정 기간 동안 점차 미국화 된 사회ㆍ문화적 영향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북한의 소련화 경향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 체제는 정반대이지만 선전과 이미지화라는 성격은 비슷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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