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린의 『고조선연구』는 북한정권 수립후 진행된 40년대 말-50년대 후반 고조선 요동중심설을 기반으로 북경대학 박사논문으로 통과된 저술이다. 북한학계는 중국 역사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顧詰剛교수의 지도를 받아 리지린의 『고조선연구』를 통과시킴으로 고조선 요동중심설을 중국학계가 동조하거나 적어도 용인하였음을 공인받기 위한 목적을 이루고자 하였다. 리지린의 『고조선연구』에 나타난 내용을 검토하면 고조선 요동설의 논리를 체계화하고 학술적 토대를 강화하려는 목적하에 력사연구소 고중세사실에서 리지린의 중국유학을 추진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리지린으로 대표되는 고조선 요동설이 중국 고대사분야의 대표적 존재인 고힐강교수의 지도를 받아 고조선의 역사공간이 중국 동북 3성지역 일대뿐만 아니라 중국 북방지역의 광대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음을 부각하는 리지린의 논문을 박사논문으로 통과시켜 북한의 고조선 요동설을 학술적으로 인정받고 관련 당사국인 중국의 공인을 받아 국제적 공신력을 확보하는 정치적 결과도 목적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리지린의 고조선관련 연구내용이 고힐강교수를 비롯한 중국학자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북한과 중국간의 국제협력 분위기를 우선시하는 중국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리지린이 제기한 ‘광대한 고대 조선인의 영역’을 설정하는 리지린의 주장은 학문적 반론이나 문제제기가 유보된 채 1961년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더욱이 1963년 이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조중 공동고고발굴이 중국의 협조하에 진행되어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광대한 고조선의 영역과 그 계승국인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 확인’되는 결과를 리지린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이같이 리지린의 연구활동과 후속된 고고학 발굴사업의 성과는 북한의 고조선연구뿐 만아니라 이후 고조선연구의 향배를 새로운 차원으로 유도하였다는 점에서 사학사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顧詰剛을 비롯한 중국학자들의 문제제기와 중소분쟁시 북한이 소련과 밀착되는 상황에서 점차 고조선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중국학계가 이에 적극 대응하는 상황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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