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진의 삶과 예술은 냉전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미소분할 점령 하 남북한모두에서 민족국가(문화)건설에 실천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경계를 넘나든국제적 냉전경험을 바탕으로 문화냉전 전을 수행한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북한에서 조선민주당과 평양문협을 거점으로 한 민족문화건설이 좌절된 후 월남하여 대한영화사, 문총, 한국문화연구소 등을 기반으로 단정수립 후 격화된 남한사회의 ‘내부 냉전’의 중심에서 반공분단국가 강화를 선도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도 월남지식인들이란 특수집단을 기반으로 문총북한지부 결성 및 기관지 주간문학예술발간, 중앙문화사 창설 등 문예조직과 미디어의공고한 연계를 토대로 한 전시 문화전을 주도했다. 조선민주당, 서북청년단, 반공통일연맹등 월남인반공단체들과의 공조에 힘입은 바 크다. 오영진은 한마디로 숨은 냉전문화기획자였던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세계냉전과의 접속을 통해 촉진/ 제약된다. 오영진은 가장앞서 세계자유문화회의, 유네스코 등 전후 문화냉전 전을 수행하고 있던 세계적 냉전문화기구들과의 협력채널을 개척하여 연대를 모색했다. 이 채널을 통해서 최신의 서구 냉전문화를 수용하여 특유의 냉전문화론을 정립하는 한편 이를 자신이 관장한 미디어를 거점으로효과적인 인정투쟁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문화 권력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또한 미공보원, 미극작가협회, 아시아재단 등 다양한 경로로 미국과 접속해 물적, 인적, 사상적 후원을 받게 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문화냉전 전이 가능했다. 이로 볼 때 오영진은 한국의 냉전문화연구의 유효적절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오영진의 냉전문화기획이 가장 돋보인 것은 전향공간에서 그가 기획․총괄한 한국문화연구소 주최의 종합예술제 개최이다. 이 종합예술제는 문학예술계, 지식인사회 전체를 전향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문화지식인들의 자진 전향을 독려․강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리적, 사상적 남북적대를 확대재생산하는 동시에 지배체제의 우월성을 배타적으로 승인․ 공고화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분산적으로 진행되던 문화적 내부냉전을 공세적으로 확산시켜 내부평정작업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문화적 헤게모니투쟁의 역동적인 장으로 기능했던 전향공간의 정치적 논리를 기회로 포착해 월남지식인이란 불리한 신원을 역전시키며 문화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전향공간에서 자기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투사된 텍스트이자내부냉전에서 승리한 친일문화인들이 냉전진영론에 입각해 한국문화계를 장악하고 구국또는 애국의 이름으로 문화냉전을 주도하는 주체로 재탄생하는 극적 전환을 암시․정당화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열전의 와중에서 전개된 오영진의 문화냉전 전은 조직, 미디어의물적 토대에다가 국방부 정훈국, 미공보원, 아시아재단 등의 후원과 원조까지 받음으로써더욱 공세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특히 아시아재단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오영진을 정점으로 한 월남예술인 집단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문화제도권으로 안정적인 진입이 가능했고 대공 사상(심리)전, 문화전의 전초가 될 수 있었다. 오영진의 문화냉전 전의 예술적 전략과 논리는 ‘기록주의’이다. 기록주의는 민족현실에 대한 처절한 위기의식의 산물로서, 열전및 냉전의 한복판에서 존망의 위기에 처한 민족현실의 특수성을 비판정신에 입각하여 리얼하게 형상화하는 정신 내지 방법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기록성에 대한 지향은 당면한 반공산주의 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적 대안이었으며, 서구 냉전예술과 접속하는 매개 고리로 세계의 초점으로 부상한 민족현실에 대한 기록주의를 통해 문화냉전 전의 이니셔티브를 확보하기 위한 욕망의 발현이기도 했다. 그의 기록주의는 대중계몽성 제고의 가능성을 바탕으로선전전, 심리전의 유력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또 문학 예술적으로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적 결합을 내포한 것이기에 저항적인 담론으로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소군정하의 북한은 기록주의의 전략적 텍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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