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정치세력은 1946년 6월에 38선을 경비하기 위해 ‘38경비보안대’를 창설했다. 그 후 38경비보안대는 1947년 9~10월에 2개 대대로 증편되었고 1948년 1월과 8월에각각 ‘38보안여단’과 ‘38경비여단’으로 개편되었다. 북한 지도부는 1949년 1~7월에 38경비여단을 3개 여단으로 증편했는데 그 이유는 1949년 초에 수립한 제한전 구상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1949년 8월에 북한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에게 강원도 삼척에 ‘해방구’를 창설하고 옹진반도를 부분 점령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제한전을 통해 미국의 개입여부와 남한의 전투력을 탐색하고 이를 계기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 전면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북한 지도부는 1949년 5~8월에 38경비여단을 투입해 제한전을 개시했지만 소련은 미군과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38경비여단의 공격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는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9년 10월까지 제1·3경비여단을 투입해 옹진반도와 강원도에서 제한전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 ‘1949년도 제한전 구상’의 핵심은 바로 김일성의 최측근이 지휘하는 38경비여단이었다. 제한전 결과 38경비여단이 옹진반도의 주요 고지를 점령함에 따라 북한군은 개전 당시 서부전선에서 지리적·전술적 우위 아래 공격을 감행할 수있었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