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역사학계에서 삼국 시기 사회경제 구성에 관한 논쟁이 진행될 무렵;마르크스의 遺稿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가 유입되었다. 당시 논쟁은 삼국 시기 노예제 사회설과 봉건제 사회설이 대립하고 있었는데;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는 림건상과 백남운으로 대표되는 삼국 시기 노예제 사회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에게 적극적으로수용되었다. 마르크스의 ‘총체적 노예제’는 조선사의 정체성론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早期 봉건사회설을 주장했던 김석형은 마르크스주의역사학의 이론적인 문제보다는 조선사의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현실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이 논쟁은 고조선․부여 등을 고대 노예 소유자 사회로;삼국시대를봉건사회로 서술한 조선통사(상)(1962)가 간행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의 이론적 근거는 조선 고대사의 역사에서 형식적으로 채용되었다. 조선사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는 ‘고대’ 논쟁의 경과와 종말은;이후 북한 역사학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으로부터 굴절되고 왜곡되는 중요한 계기이자분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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