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나눔 아카이브 8000만

전체메뉴

학술

  • HOME
  • 논문
  • 학술

만리장성의 동쪽 끝과 낙랑군의 위치

the eastern end of the Great Wall and the location of NakrangKun County

상세내역
저자 이덕일
소속 및 직함 순천향대학교
발행기관 바른역사학술원
학술지 역사와 융합
권호사항 8(2)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145-190
발행 시기 2024년
키워드 #만리장성   #수안   #평양   #갈석산   #제국주의 역사학   #이덕일
원문보기
상세내역
초록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403~221) 이후 중원의 역대 왕조는 여러 목적으로 장성(長城)을 쌓았다. 그중 연·진(燕秦) 장성은 북방 기마민족의 남진을막기 위해 쌓은 것이고;이런 성격은 한(漢) 장성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만리장성은 중원 역대 왕조가 자신들의 강역을 표시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만리장성 안쪽은 중원 왕조의 영역이고 그 바깥쪽은 북방 기마민족의 영역임을 뜻하는 국경선이기도 했다. 역사상 중국 만리장성의 가장 동쪽 끝은 명(明:1368~1644) 때 쌓은 산해관(山 海關)이었다. 그런데 지금 중국 국가박물관은 진·한(秦漢) 때 만리장성이 평양 근처까지 온 것으로 그려놓고 있다. 이는 1910년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한국사의 강역을 한반도 내로 가두려는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처음 고안한 제국주의 역사학의 논리였다. 이나바 이와기치는 「진 장성 동쪽 끝 및 왕험성에 관한 논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에서 진(秦) 장성이 지금의 북한 황해도 수안(遂安)까지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제국주의 침략이론을 1931년 중국의 왕국량(王國良)이 『중국장성연혁고(中 國長城沿革攷)』에서 받아들이면서 진장성이 평양까지 왔다고 조금 변형시켰다. 해방 후에도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사관을 추종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한국 강단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는「낙랑군고(樂浪郡考)」에서 이나바 이와기치의 논리를 표절해서 진 장성이황해도 수안까지 내려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현재 일본 제국주의 침략논리인 진 장성 동쪽 끝이 한반도 북부까지 내려왔다는 주장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명(明)에서 역사상 가장 동쪽의 산해관을 쌓은 것은 만주족의 침입을 막기위한 것이었다. 만주족이 설립한 청은 더 이상 장성을 쌓지 않았다. 진(秦) 장성은 물론 중국의 어느 장성도 한반도 안까지 들어온 적이 없다. 진(秦)이 장성을 쌓은 것은 흉노(匈奴)와 고조선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진과 고조선의국경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갈석산 부근이었고;그 북쪽에 진·한(秦漢) 장성의 유적이 있다는 사료가 있다. 고대 진·한(秦漢) 장성은 이 갈석산을 넘지 못했다. 갈석산 동쪽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