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나눔 아카이브 8000만

전체메뉴

학술

  • HOME
  • 논문
  • 학술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과 일본 OECF 차관의 도입

Construction of Seoul Subway Line No.1 and Introduction of Japan’s OECF Loan

상세내역
저자 박광명
소속 및 직함 국사편찬위원회
발행기관 동국역사문화연구소
학술지 동국사학
권호사항 79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353-384
발행 시기 2024년
키워드 #지하철   #1호선   #서울   #대외경제협력기금(OECF)   #차관   #코리아게이트   #박광명
원문보기
상세내역
초록
1971년 4월 12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8월 15일에 개통된 지하철 1호선은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의 분기점에 위치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 비해 지하철 1호선 건설에 대한 역사학 분야의 연구는 미흡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건설의 역사적 의미에 비해 연구 결과가 미흡했던 이유는 관련 사료의 부족과 기존 사실 규명에 천착한 연구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지하철 1호선 건설의 역사적 의미를 재평가하고;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철 1호선 건설과 관련된 일본의 OECF(대외경제협력기금) 차관 도입 과정을 분석하였다. 지하철은 근대화ㆍ산업화ㆍ도시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특히 지하철 1호선 건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건설이라는 수식어만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지하철 1호선 건설은 경제 성장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지표였다. 실제로 지하철 1호선이 개통 이후 남북한의 경제 지표는 역전되었다. 또한 지하철 1호선 건설은 지자체 중심의 대규모 토목 사업의 표본이 되었다. 서울의 지하철 건설에 대한 논의는 일본 식민지 시대부터 형성되어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비록 지속적인 논의와 계획이 있었지만;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로는 지하철 건설에 투입할 자원이 부족하였다. 하지만;서울의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유입은 지하철 건설을 더 이상 단순한 계획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마침내;일본의 OECF 차관 도입과 함께;지하철 건설이 진행되었고;1974년 8월 15일에 개통되었다. 물론 지하철 1호선 건설 배경에는 이러한 서울의 과밀화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 1호선 건설 배경에는 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타난 ‘여촌야도’ 현상이 영향을 미쳤다. 1971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정부는 서울과 부산을 포함한 대도시에서 표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이외에도 냉전 시기 남북한의 대치 상황 역시 지하철 1호선 건설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하철 1호선 건설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박정희 정부가 차관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전형적인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는 이후 ‘코리아 게이트’ 사건 수사 과정에서 미국 의회의 청문회를 통해 드러났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960년대 이전 서울의 지하철 도입 논의
Ⅲ. 건설 계획 수립과 OECF 차관
Ⅳ. 지하철 부설을 둘러싼 문제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