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楊州’라는 지명 어휘는 후삼국시대 왕건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부터 보이나;이는 고려시대(태조) 지명이 소급 적용된 것이다. 고려 건국 직후 지금의 서울시 지역을 ‘양주’라 지칭하고;지금의 양주시 지역을 ‘견주’라 칭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견주는 삼국시대의 買省縣[郡]에서 비롯되었는데;통일신라시대에는 來蘇郡이라 불렸다. 고려 태조 때 단독 행정 단위로 설정되었던 견주는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현종 때 양주 관할로 편제되었다. 이때 양주의 治所는 지금의 서울 중심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주는 문종 때 南京으로 승격되었고;충렬왕 때 漢陽府로 개편되었다. 조선의 건국 이후 그 도읍을 지금의 서울시로 정하면서;고려의 한양부를 조선의 한성부로 개편하였다. 아울러 조선은 고려시대의 한양부를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인 견주 지역으로 옮기면서 그 행정 지명 또한 ‘양주’로 개칭하였다. 이때 지금의 양주시 지역에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한양부의 이전과 양주의 설정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판단된다. 조선 태조 때 한성부 설치와 함께 한양부가 양주군으로 강등되면서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원의 ‘東村 大洞里’로 잠깐 옮겨 갔던 것이다. 이 동촌 대동리는 신라 한양군(북한산군)의 치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지금의 서울 지역인 동촌 대동리에 짧은 기간 입지에 있던 ‘양주’가 견주 지역에 새로이 관아를 조성한 후 옮겨가면서 지금의 양주시 양주1동(유양동) 일원에 치소를 두었다. 이곳이 조선 후기 양주군 邑內面이다. 이때 견주의 경우는 기존 치소 위치를 존속하고 있었는데;그 지역이 지금의 양주시 양주2동(고읍동)이며;조선 후기에 古州內面으로 지칭되었다. 이러한 고주내면과 읍내면이 합하여 후에 州內面이 되었다가 해방 이후 양주군 양주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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