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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 買省에서 朝鮮 楊州로의 變遷 過程*-경기도 양주시의 역사지리적 공간-

The Transition from Ancient Maeseong to Yangju;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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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정운용
소속 및 직함 고려대학교
발행기관 한국고대학회
학술지 선사와 고대
권호사항 74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21-47
발행 시기 2024년
키워드 #買省   #來蘇郡   #見州   #楊州   #東村 大洞里   #정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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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楊州’라는 지명 어휘는 후삼국시대 왕건의 정복 전쟁 과정에서부터 보이나;이는 고려시대(태조) 지명이 소급 적용된 것이다. 고려 건국 직후 지금의 서울시 지역을 ‘양주’라 지칭하고;지금의 양주시 지역을 ‘견주’라 칭하였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견주는 삼국시대의 買省縣[郡]에서 비롯되었는데;통일신라시대에는 來蘇郡이라 불렸다. 고려 태조 때 단독 행정 단위로 설정되었던 견주는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현종 때 양주 관할로 편제되었다. 이때 양주의 治所는 지금의 서울 중심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주는 문종 때 南京으로 승격되었고;충렬왕 때 漢陽府로 개편되었다. 조선의 건국 이후 그 도읍을 지금의 서울시로 정하면서;고려의 한양부를 조선의 한성부로 개편하였다. 아울러 조선은 고려시대의 한양부를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인 견주 지역으로 옮기면서 그 행정 지명 또한 ‘양주’로 개칭하였다. 이때 지금의 양주시 지역에 ‘양주’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한양부의 이전과 양주의 설정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판단된다. 조선 태조 때 한성부 설치와 함께 한양부가 양주군으로 강등되면서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원의 ‘東村 大洞里’로 잠깐 옮겨 갔던 것이다. 이 동촌 대동리는 신라 한양군(북한산군)의 치소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지금의 서울 지역인 동촌 대동리에 짧은 기간 입지에 있던 ‘양주’가 견주 지역에 새로이 관아를 조성한 후 옮겨가면서 지금의 양주시 양주1동(유양동) 일원에 치소를 두었다. 이곳이 조선 후기 양주군 邑內面이다. 이때 견주의 경우는 기존 치소 위치를 존속하고 있었는데;그 지역이 지금의 양주시 양주2동(고읍동)이며;조선 후기에 古州內面으로 지칭되었다. 이러한 고주내면과 읍내면이 합하여 후에 州內面이 되었다가 해방 이후 양주군 양주읍이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언
Ⅱ. ‘楊州’ 지명의 등장
Ⅲ. 삼국시대 買省의 존재
Ⅳ. 고려시대 見州의 입지
Ⅴ. 조선시대 楊州의 성격
Ⅵ. 결어
참고문헌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