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당시의 한국전쟁은 유엔군과 공산군이 휴전회담과 국지전을 병행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 해 4월 12~13일에 북한에서는 임진왜란 360주년 기념 기사들을 『민주청년』, 『로동신문』, 『민주조선』 등 언론 매체를 통해 일제히 보도하였다. 북한은 임진왜란 발발 360주년 기념 기사를 통해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결부하면서, 미군에 대한 투쟁과 중공과의 연합이라는 현실을 반영하였다. 국내에서는 북한의 임진왜란사 인식을 다룬 성과가 등장하였으나 한국전쟁기 북한의 언론 매체의 임진왜란의 보도 내용은 아직 연구되지 않았다. 당시의 언론 기사가 정제된 역사저술로 만들어지기 이전 단계로서 의미를 가지며, 해당 논설의 필자들이 이후 북한의 역사인식 정립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높기에 그에 대한 분석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북한 당국의 보도 매체에서 표방된 ‘임진왜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2년 당시 북한 신문들의 임진왜란 기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순신의 수군 활동과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의병 활동, 관군 및 의병에 대해 후방지원을 하였던 일반 인민들과 여성들, 명군의 파병과 연합작전 등이다. 북한 신문에 보도된 임진왜란 기사 내용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당시 북한에서는 조선의 내부 문제를 비판하여 지배층의 역할을 축소 내지 도외시하고, 상대적으로 인민의 투쟁을 크게 부각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명나라를 ‘응원부대’로 명명하고, 임진왜란을 ‘동양 인민들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양국이 국제적 공동투쟁을 전개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미군에 대한 국제적 공동투쟁’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전쟁과의 연관성을 부각한 것이다. 1952년 당시 북한 신문에 보도된 임진왜란 보도 내용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의병과 조선수군의 활동보다 인민들의 원호활동을 먼저 언급하고 강조하였다는 점과 강화교섭에 ‘평화지향’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내용이다. 특히 강화교섭을 조선의 평화지향으로 보는 견해는 기존의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거의 보지 못한 독특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정전 이후에도 북한 역사학계는 대외항쟁사 연구를 진행하면서, ‘임진왜란’을 주요한 주제 중의 하나로 다루어졌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이 외세의 침략과 인민의 항쟁이라는 구도로 서술되기에 매우 유용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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