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종식 이후 북한은 심각한 외교적 고립 속에서 미국,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탈출구로 삼았다. 1988년부터 북경에서 참사관급 접촉을 시작한 북미 양측은 1991년 한 해 동안 5차례 회담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은 대화를 유지했다. 그리고 한국은 북미관계가 남북관계를 앞서지 않도록 노력했다. 1991년은 북일수교가 공식화된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은 표면적으로 북일관계 정상화를 지지했으나, 실제로는 사전협의를 통해 일본의 대북 관계개선 움직임을 관리하고자 했다. 1991년 1월 시작된 북일수교 회담은 북핵문제의 해결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일본인 납치문제까지 제기되면서 양국 모두는 수교교섭개시에 만족해야만 했다. 결국 1991년의 북한은 대미, 대일 관계개선을 위해노력했지만, 원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반면 한국은 미국의 점진적인 대북관계개선 의지와 북일 수교의 급진전 가능성 속에서도 남북대화와 남북관계, 유엔외교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본 연구는 1991년의 한국과 미국이 대북정책의 방향성을 놓고 물밑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1991년의 북일수교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배상이 남북경협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국이한소경협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음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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