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중국의 참전과 함께 본격적인 국제전으로 전환되었지만, 중국군대의 참전과 이후의 상황에 대한 공산 3국의 입장은 항상 합치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전쟁에 대한 각국의 이해와 목표의 차이는 드러나지 않은 갈등과 모순을 초래하였다. 중국은 이념보다는 자국의 안보라는 실리가 더 중요했고, 소련은 종합적인 상황 관리를 위해서 단계마다 필요한 선택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유엔과 공산측 모두는 자기 진영의 완전한 승리보다는 확전을 자제한 제한전쟁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김일성 지도부는 중국의 참전을 계기로 전쟁 초기의 목표를 달성할 기회를 잡았다. 그는 한동안 자신이 발표한 “원쑤들에 대한 공격의 속도를 일층 강화하며, 후퇴하는 적들에게 숨 쉴 사이를 주지 말며, 새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기회를 주지 말며, 병력을 재정리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말”라는 구호를 북한 사회 전체에 확산시켰다. 하지만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 휴식이 필요했던 중국군대에 대한 중국지휘부의 방침을 마지못해 수용함으로써 한국전 개전에 이어 북한지도부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는 물거품이 되었다. 중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통일의 희망을 상실한 것이다. 더 이상 북한측으로서는 승전의 기대 없이 소모전과 미공군의 항공 폭격으로 인해 피해만 가중되는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휴전협상이 개시되었을 때 북한이 가장 정전을 원하는 상황이 지속되지만, 국제전으로 변모한 전장 환경은 휴전협정 체결을 2년 이상이나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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