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山은 한국 최고의 名山으로 高麗 후기부터 급속히 불교신앙의 수행처로 주목받아 100여 개의 사찰과 암자가 창건 또는 중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사찰과 경관을 보기 위한 遊覽文化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영향으로 금강산을 유람한 승려와 지식인들은 많은 記文을 저술하였다. 그 내용에는 그들이 직접 본 사찰의 변화상이 기록되었고 승려와 나누었던 담론도 실려 있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금강산을 다녀온 수행승과 유람객의 遊山記를 중심으로 금강산에 소재한 사찰의 모습과 승려의 法脈을 살피고자 한다. 유산기는 유람을 다닌 당대의 기록이므로 1차 사료에 해당한다. 금강산은 북한에 소재하여 자유롭게 답사를 할 수 없고 한국전쟁 당시에 대부분의 사찰 유산이 파괴되어 현상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유람객이 남긴 유산기를 통하여 당시의 모습을 검토하였다. 현재는 현장을 답사할 수 없고 불교 유산이 파괴되어 직접 비교할 수 없는 유산을 유산기만으로라도 당시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검토일 수 있다. 유산기를 통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를 파악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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