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북한의 국가 건설기와 한국전쟁 기간 최명익의 문학을 살펴보고, 1953년 초 박헌영 계열 문학자들이 숙청될 때 같이 경고를 받은 이유를 조명하겠다. 해방 직후, 최명익은 특정 이념을 추구하지 않는 ‘중간파’를 표방하고 평양예술문화협회를 결성하였지만, 토지개혁을 지지하고 북한에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는 것에 협조하였다. 또한 최명익은 김일성을 새 국가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일제 말과 해방 후 국가 건설기에 북한 주민들이 발휘하는 애국심의 고무자라고 선전하는 북한 문학의 노선을 따랐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 최명익은 박헌영 계열 문학자들과 협력하였으며, 「기관사」(1951)와 같은 소설에서 인민민주주의와 조선로동당을 애국심의 원천으로 강조하는 등 박헌영의 노선을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명익은 1953년 초 이태준과 달리 숙청되지 않고 경고만 받았다. 그 이유는, 최명익이 수많은 문인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자기의 영도자인 김일성을 알고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전부터 평양을 근거로 활동한 소수의 작가로서 북한 문학의 평양 중심주의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해방 직후부터 최명익이 중간파로서 인민민주주의 제도를 지지했다는 점과 한국전쟁 기간 최명익이 박헌영 계열 문학자들과 협력하였다는 점을 밝혔다. 이것은 북한 작가 최명익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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