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60년대 들어 중소분쟁과 경제·국방 병진 노선의 실시 등 대내외적위기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내우외환은 북한 지도부에게 일제 말기 항일유격대를 이끌었던 고난의 시기를 되새기도록 만들었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신화화하고 유격대식 삶을 본받아야 할 전범으로 선전하며 인민들에게그 풍모를 체득하며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백두산이 항일혁명 전통의 성지로 상징화되기 시작했다. 백두산은 항일무장투쟁의 혁명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자, 소위 ‘백두혈통’의상징으로 그려지며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매개체로 활용되었다. 그 이유로그간 백두산에 관한 연구는 북한 혁명 전통의 확립 과정이나 우상화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뤄왔다. 하지만 백두산이 해방 직후부터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장소로 그려지거나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한 상징으로 활용된 것은 아니었다. . 백두산은 1950년대 초만 해도 영토의 귀속성을 확인하고 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졌으며, ‘유격대 국가’ 건설 과정에서는 범 동북항일연군 계열이 함께 공유하고 있던 무대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냉전 해체 이후에는 체제 위기 속에서 인민들을 단결시키는 매개체이자 남북통일의 상징으로 표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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