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부는 1949년 3월에 스탈린과 회담에서 무력통일방식이 간접적으로 승인되자, 1949년도 하기 인민군 증편계획을 수립해서 해군 창설을 개시했다. 그리고 청진항에 주둔한 소련 해군으로부터 무기·장비·교범·고문 등 군사지원을받아서 1949년 8월 28일에 정규 해군을 창설했다. 민족보위성은 육군과 달리해군에 병종지휘부를 설치해서 뒤늦게 창설된 해군의 전력을 급속히 증강시키려고 구상했다. 북한 해군이 육군·공군과 다른 점은 그 지휘부까지 대부분 소련에서 입북한고려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북한 해군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10개월 전에 창설되었고 해상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전력을 거의 보유하지 못했다. 북한지도부는 이 같은 상황에서 소련군에 익숙한 고려인을 해군사령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해서 소련 해군의 현대적 군사교리를 급속히 도입했다. 민족보위성은 소련에서 연안방어 중심의 군사교리를 도입했고 6·25전쟁을준비하면서 해군에 독자적인 해상전투나 지상군에 대한 함포공격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북한지도부는 2개 육전대를 후방 해안에 상륙시켜 후방을 교란하려 했고, 전략지역인 원산·청진·진남포에 방어부대를 편성하고 함정의 절반을계류시켜 국군 해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결국 북한 해군은 보조적 공격임무와 연안방어 임무를 맡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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