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세기 후엽경 북한강유역권에서는 가평 대성리와 달전리, 그리고 최근 발굴된 남양주 금남리 등지를 중심으로 이전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계통의 철기문화가 구성된다. 이는 초기철기시대에 유행하던 주조철기문화와 함께 ‘단조제 무기류’를 주류로 한 단조철기문화가 결합된 양상이다. 이러한 철기문화는 오랜 기간 동안 낙랑군(樂浪郡) 설치에 따른 한(漢)의 선진적 철기문화의 이식으로 견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유형의 철기문화에는 한(漢)의 전형적인 철기가 도입되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강유역권에 나타난 철기문화는 주조철기 중심의 고조선 철기문화의 바탕 위에 진한대(秦漢代)를 즈음하여 도입된 단조기술이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보았을 때, 새로운 유형의 철기문화를 구성할 수있었던 세력은 고조선(古朝鮮)의 전통 위에 한(漢)의 병위재물(兵威財物)을 획득할 수 있었던 위만조선(衛滿朝 鮮)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위만조선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철기문화가 한반도 남부지역 중 특히 북한강유역권에 먼저 전달된 데에는, 이곳 지역세력이 위만조선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가장 외연(外緣)의 지방세력이거나, 위만조선의 철기 유통망에 밀접하게 가담한 세력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즉 ‘중앙’으로부터의 밀접한 영향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가장 처음으로 초기철기문화와는 다른 보다 발전된 철기문화를 영위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중앙’과의 밀접한 지정학적 위치는 역설적이게도 도입된 철기문화가 지역사회 내에 연속적(連續的)으로 계승(繼承)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낙랑군(樂浪郡) 설치라고 하는 외부사회의 정치·경제적 자극은 북한강유역권에서 상당 기간 동안 철기를 비롯한 고고학적 요소가 희소하게 되는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 새로운 유형의 철기문화가 북한강유역권 내에서는 지속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다시 영남지역으로 이입되면서 진·변한 철기문화의 주요 기종으로 계승(繼承)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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