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의 상봉을 위해 1972년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을 전개하였다. 7차에 걸쳐 진행된 남북적십자회담은 1973년 북한측의 일방적 통고로 중단되면서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였다. 1974년 7월부터 적십자회담의 재개를 위해 남북적십자의 실무회담을 시작했으나 이마저도 1978년 3월 19일 북한 적십자회중앙회 측의 일방적 무기 연기 통고에 따라 중단되었다. 1980년 중반 남북한은 ‘제2의 대화 시대’라고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대화와 교류가 진전되었다. 1985년은 남북간에 대화와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해로 5번의 경제회담, 국회 회담을 위한 예비접촉 두 차례, 1번의 체육 회담(로잔), 3번의 적십자회담이 열렸다. 1984년 북한 적십자회중앙회측의 수해물자 제공의사를 대한적십자사가 수용한 것을 계기로 남북적십자회담도 다시 재개되었다. 1985년 제8차, 9차, 10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열렸는데, 특히 8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남북적십자회담의 결과 1985년 9월 분단 40년만에 최초로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을 상호교환하는성과를 이루었다. 1985년 남북고향방문단의 교환을 통해 가족이나 연고자를 만난 이산 가족은 평양에서 상봉한 남한측 가족 35명, 서울에서 상봉한 북한측 가족30명 등 모두 65명이라는 제한된 규모, 제한된 지역의 방문이었다. 3박 4일의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공연예술단의 교환이었지만, 분단의 아픔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가를 재확인해주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여전히 체제 대립 속에서 진전된 단계로 나아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알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단과 공연예술단 교환의 성과이며 남북한의 교류를 통해 이질화를 해소하는 것은 이후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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