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한국현대음악사의 기원이 되는 해방, 분단, 한국전쟁, 정전(전후)을 아우르는 총체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기간은 민족국가수립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좌절된 후 전쟁과 분단이라는 남북한의 역사적 갈등이 응축된 시기이며 국제적으로는 세계냉전으로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시기이다. 해방 후 좌우익의 이념대결이 치열했지만 음악가들은 음악계의 단결을 촉구하며 1946년 삼일절 기념음악회를 공동으로 주최했고『 임시중등음악교본』과 해방기념음악회, 전국음악경연대회 등을 통해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7년을분기점으로 세계냉전 국면으로의 전환과 그 해, 8월부터 미군정에 의해좌익활동이 전면금지되면서 좌익예술가들은 지하로 숨게 된다. 1948년은 단정을 둘러싼 내부냉전이 격렬하게 일어나면서 제주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냉전의 논리를 남한사회 안으로 내면화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문화예술인 사이의 공모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은 90일간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 기간동안‘문련’ 산하의 예술단체가 조직되어 예술가들이 북한군에 부역하였다. 서울 수복 후 ‘문총’은 부역자 처벌과 종군문화반을 파견해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유지하였다. 한편, 월남음악가들도 자신의 반공사상을 증명하기 위해 군가보급단에서 활동하면서 체제에 길들여진다. 전쟁 후 한국음악계는 미국과의 우호를 증진하는 한편, 미국무부 및민간재단의 원조로 음악가들의 미국 연수와 미국음악가의 내한공연, 한국음악계의 재원지원 등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교섭력이악단의 권력으로 발돋움하는 데 중요한 자격조건이 되었다. 정부는 반공의 문화적 냉전을 수행한 음악가들을 여러 제도를 통해 포상하고 이 과정에서 그들의 대일협력 과오는 무마되었고 제도권 음악권력이 유지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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