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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계의 백제 역사인식

Recognition of Baekje History by North Korean 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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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성준
소속 및 직함 문화재청
발행기관 백제학회
학술지 백제학보
권호사항 (40)
수록페이지 범위 및 쪽수 63-88
발행 시기 2022년
키워드 #노예사회   #봉건사회   #요서영유   #분국설   #시조왕 숭배사상   #이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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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백제사에 대한 북한 학계의 지향점은 고구려사의 정립에 일조하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의 아들이 백제를 건국했다는 인식은 국가체제, 물질문화, 대외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을 강조하게 하였다. 이것은 소위 인민의 투쟁사를 발굴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당위성을 공고히 하고, 사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하지만 백제의 제도와 문화가 고구려의 선진성과 주체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했다는 해석으로 귀결되면서, 과장된 역사인식과 편중된 시각에서 비롯된 폐단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 학계는 고구려의 건국시점을 기원전 1세기 초로 규정하였고, 이에 따라 백제는 기원전 1세기 중엽 봉건소국, 기원후 1세기 중엽 봉건국가가 된 것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김정일의 교시에 따라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277년으로 수정하면서, 백제는 기원전 3세기 중엽 봉건소국, 기원전 1세기 말 봉건국가가 되었다고 정정된다. 그리고 백제의 사비 천도가 고구려의 장안성 천도보다 48년 앞선다는 맹점을 해결하기 위해 장안성의 건설 이후 나성이 착공되었고, 이에 따라 7세기 전반 고구려식의 도성제가 백제에 완성되었다는 논리를 만든다. 고고자료에도 고구려의 선진기술과 제도의 파급이 선명하다는 기조는 이어진다. 토기의 형태적 특징, 기술적 유형, 문양 등에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생활풍습, 감정, 정서, 취미가 서로 같았기 때문이고, 백제 초기 수막새에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특징이 관찰된다고 한다. 기단식적석총은 고구려보다 2~3분기 정도 후행하도록 설정하였고, 고구려 석실묘의 구조를 감안하여 백제의 석실묘를 편년하면서, 부여 능산리와 서울 가락동의 일부를 4세기로 분류하였다. 또한 고구려 능제의 도입을 부여 능산리 사지의 건설 배경으로 제시하며, 능산리 2호분(중하총)을 성왕이 아닌 백제 시조 구태의 능으로 비정하였다. 이처럼 한국과 북한 학계의 간극은 학문적 방법론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만 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향후 의미 있는 접점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고대 동아시아의 역학구도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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