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갑산파 숙청은 북한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갑산파 숙청 이후 북한에서는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지도체계가 확립되었고 개인숭배 구조가 정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전통’은 점차 그 내용을 풍부히 하면서 북한사회의 절대적인 규정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본 연구는 갑산파 숙청 원인을 당대 자료에 기초하여 다시 살펴보고, 갑산파 숙청이라는 정치 변동의 여파가 ‘혁명전통’의 내용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다. 첫째, 당대의 자료에서는 갑산파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과 별개로 자신들의 항일투쟁을 강조하려는 모습이나 ‘혁명전통’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선행연구의 주장과 달리, ‘혁명전통’과 결이 다른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갑산파가 주도했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혁명전통’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요컨대 기존 연구에서 주장하는 갑산파의 ‘혁명전통’ 다원화 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갑산파 숙청의 근본적인 원인은 후계체제에 대한 갑산파의 반발이었다. 1966년경 박금철 등 갑산파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떠오른 김영주와 김정일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후계구도를 둘러싼 갈등의 결과로 갑산파가 숙청되자 ‘혁명전통’의 내용은 김일성 가계(家系)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굴절되었다. 김일성 가계의 ‘혁명화’는 김정일로의 대를 이은 계승에 대한 정당화 시도였다. 즉, 북한에서 ‘혁명전통’은 그 전통의 ‘적자(嫡子)’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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