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4세기 서북한지역의 명문자료에 대해 화자와 메시지의 전달 방식, 그리고 메시지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먼저 4세기 서북한 출토 명문자료는 망자를 위한 안식의 공간인 고분 내에 위치한 명문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장무이묘의 전명과 덕흥리고분의 묵서명에서 생자인 측근세력들은 망자의 죽음을 처리하고 고분의 축조에 들인 공력과 경제력을 과시함으로써 망자를 계승한 지위를 드러내고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면서 동류 집단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명문자료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4세기 서북한의 명문자료에는 명문전과 묵서명이 있다. 명문전은 무덤의 축조과정에서 축조 재료로 매납되지만, 장송의례 과정에서 메시지는 지속적으로 노출되었고, 여러 점 내지 여러 세트의 명문전이 다량으로 제작되어 현실과 연도 등 고분의 여러 지점에 감입됨으로써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벽화고분의 묵서명 경우에는 무덤 안으로 들어와 내부 구조와 벽화를 구경했던 ‘관람자’의 존재가 상정된다. 이러한 명문자료는 고구려 중앙정부와 서북한지역의 구 낙랑대방군 세력과 북중국 망명인, 그리고 재지 토착세력 등이 독자로 상정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명문에 있는 망자의 관작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4세기 명문자료 중에는 허호의 자칭이 다수 확인된다. 348년 대방태수 장무이의 사례는 ‘대방태수’를 표방하면서 종래 대방군 설치되었던 지역에 대한 현실적인 지배 내지 연고를 고구려로부터 보장받고자 한 것이다. 이와 달리 현지 기반이 없었던 북중국 망명인인 동수나 진의 관직은 허직이면서 여기에는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망명인들은 관작의 자유로운 표방과 적극적인 과장을 통해 중원 왕조의 정체성을 강하게 내세웠으며, 이를 매개로 고구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고 후속의 기반을 보장받고자 하였다. 동류의 북중국계 망명인 집단에게는 이러한 메시지를 통해 자신들의 기존 지위를 유지하면서 공고한 결속을 계속 다지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한편 주변의 재지 토착세력들에게 중원 왕조의 관작으로 분식된 허호를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불안정한 지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서북한 지역의 명문 자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관작은 생자들의 입장이 반영되면서 고구려 중앙정부와 동류 집단, 그리고 재지 주민 등 다양한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다중적인 정치 사회적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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