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남과 북, 북과 남에서는 거의 동시에 적십자사가 재조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47년 3월 15일 조선적십자사가, 1949년 10월 27일에는 대한적십자사가, 북측에서는 1946년 10월 18일 북조선적십자사가, 그 후 조선적십자회로 개명되어 발전하였다. 적십자의 지부의 경우, 흥남지부가 1947년 1월 28일에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이어 1947년 2월 10일에 평양특별시 지부가 조직되었다. 위원장 리동영, 부위원장 손창숙, 박근모 등이었다. 조선적십자회는 1949년 현재 사원이 110여 만 명이었으며, 도‧시‧군‧면리‧학교‧직장 등에 1만 6,000여개의 지부조직을 갖고 있었다. 북측은 남측의 적십자활동을 “기만적인 부르죠아 박애주의와 인도주의로 가장하고 반동지배층과 제국주의 군대에 충실히 복무하면서 침략전쟁을 방조하기 위한 전시사업에만 치중하고 평시사업을 극히 국한된 범위에서 그나마 인민의 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선사업의 간판 밑에 반동화한 자기 본질을 음폐하며, 반동지배층에 대한 인민들의 반항과 투쟁을 마비시키려는 수단으로 리용되고 있다. ”라고 비난하였다. 이는 자신들의 적십자활동만이 정당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북측은 “대중적 위생훈련사업과 중등 및 초등 보건간부양성사업과 군중보건문화사업을 광범히 전개하고 각종 재난시의 구제 및 구호 사업을 조직 실시하는 것”을 기본 목적을 밝히고 있다. 조선적십자회는 1946년 조직된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되기 전까지 활발한 적십자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서 의료기술자 양성, 인민의 복리와 보건생활을 위한 활동, 농촌계절탁아소와 공장위생초소, 무료순회진료사업, 위생방호원 양성소 설치 등을 들 수 있다. 주요 간부는 의사 등 보건인력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창립 부위원장인 최창석, 창립위원인 장기려‧허신‧한도준‧김상민‧리성숙 등이 모두 그러하다. 북한적십자의 조직과 활동, 병원의 설립‧운영, 의료환경개선 등에는 소련 적십자의 원조와 지원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49년 소련적십자병원의 철수시 북한에 15개 적십자병원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한국전쟁의 발발 이후 조선적십자회는 군인들의 치료와 세균전 대비에 전념하였다. 아울러 소련을 위시하여 불가리아‧헝가리‧동독 등 다양한 동유럽 나라들의 적십자와 유대관계를 확대해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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