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남북에서 그동안 억압되었던 작가들에 대한 해금이 진행되었는데, 북한에서는 1984년에 남한에서는 1988년에 많은 작가들이 풀려나 널리 읽혀졌다. 남북 모두에서 금지되었던 정지용과 김기림이 이 시기에 읽히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김기림은 매우 문제적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한반도에서 갑자기 사라진 김기림은 해방직후 줄곧 남북협상파로서 활동하였다.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김기림은 미국과 소련을 적극 환영하였다. 일본을 제압한 미국과 소련의 힘을 업고 통일독립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신탁통치가 시작되자 비판적 지지로 전환하였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제국의 이익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길 아니고는 통일독립을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 없기에 비판적 지지를 하였다. 1947년 중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김기림은 분단이 올 위험성을 감지하고서는 남북협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부 지식인들은 소련을 믿고, 다른 일부 지식인들은 미국을 믿으면서 한반도가 급속하게 분단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김기림은 이 모두를 비판하면서 남북협상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남북에 분단 국가가 각각 들어서고 나아가 남북협상의 버팀목이었던 김구마저 사망하자 간신히 자신을 지탱하다가 결국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사라져버렸다. 전쟁 이후 남북한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남한에서 김기림이 해금되면서 연구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는데 주로 모더니즘의 각도에서 진행되었다. 1984년 이후 김기림은 북한에서도 해금되었는데 주로 민족적 향토적 측면에서만 다루어졌다. 남북에서 행해진 이러한 김기림 이해는 1930년대 이후 유럽 근대를 비판하면서 비서구 식민지의 세계사적 가능성을 탐구하였고 이 연장선에서 남북협상운동을 벌였던 김기림과는 잘 맞지 않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이후 유럽의 위기를 감지하고 그 대안을 탐색하였던 김기림의 세계 이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근대성과 제국의 근대성에 대한 그의 미학적 대응을 충분히 감안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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