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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1971년 유엔의 한반도 분단 관리 구조의 형성과 전개

.A Study on UN’s Role in Regulating the Division System of Korean Peninsula, 1953〜1971

상세내역
저자 류기현
학위 박사
소속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전공 국사학과 한국현대사
발행연도 2024년
쪽수 322
지도교수 정용욱
키워드 #류기현   #유엔   #한반도 통일   #제3세계   #냉전   #비동맹운동   #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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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역
초록
본 연구는 1953년 정전 이후부터 데탕트가 본격화되는 1971년까지 유엔의 한반도 분단 관리 구조가 형성·전개되는 과정을 유엔총회 ‘한국 문제’ 논의의 변천을 중심으로 고찰했다. 특히 본 연구는 ‘지구적 냉전사’의 시각에서 비동맹·중립 제3세계의 성장이 한반도에 대한 유엔의 정치적·군사적 관여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1장에서는 6.25전쟁 이후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모색한 제네바 회담의 실패 이후 한반도 문제가 다시 유엔으로 이관되고, 이 과정에서 ‘한국 문제’가 유엔총회에서 연례 토의의 대상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제네바 회담에서는 한국 통일과 관련하여 나올 수 있는 대부분의 제안들이 거론되었지만, 양측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유엔의 권위 문제를 두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며 회담은 결렬되었다. 유엔측 참전 16개국이 제네바 회담의 결렬 당시 내세운 ‘2대 원칙’은 1954년 9차 총회 결의를 통해 한반도 통일에 대한 남한과 미국·서방 진영의 기본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2대 원칙’은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유엔의 권한과 권위를 인정할 것, 유엔 감독하의 자유 선거를 통해 한반도를 통일할 것을 골자로 한다. 이는 6.25전쟁에서 유엔을 적으로 맞아 싸운 북한·중국 입장에서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었고, 그런 점에서 ‘2대 원칙’은 미국과 남한이 분단 상태의 현상 유지를 정당화하고 북한·중국에 대한 봉쇄를 지속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부분은 인도가 수행한 역할이다. 인도는 중립 노선의 추구라는 차원에서, 또한 인접한 중국과의 안정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 문제의 중재 역할을 자임했다. 미국은 거대한 영토·인구를 갖추었으며, 신생독립국의 지도 국가로 부상한 인도의 국제적 위치를 의식했고, 국제회담 개최 등 한반도 문제의 ‘현상타파적’ 해결을 추구한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유엔이라는 틀을 더욱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국이 인도를 비롯한 중립국·제3세계 국가들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유엔총회 ‘한국 문제’ 논의가 제도화되었다.
2장에서는 유엔 내 서방 진영의 수적 우위가 유지되는 가운데 유엔의 대한반도 관여가 지속되고, 1950년대 후반 들어 신생독립국이 유엔에 본격적으로 가입하기 시작하면서 유엔 참전국 내 균열이 가시화된 상황을 다룬다. 1950년대 중반 인도를 비롯한 중립국 일각에서 남북한 직접 교류를 주장하자 미국은 그러한 논의의 확산을 봉쇄하기 위해 총회 ‘한국 문제’ 논의를 통해 ‘2대 원칙’을 지속적으로 재확인했다. ‘2대 원칙’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자 한국 사회에서는 통일의 수단으로서 유엔이 갖는 유용성에 의구심이 나타났고, 미국은 언커크를 활용해 대응하는 방안을 구상했으나 우방국의 반대로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1950년대 후반 들어 중립 성향 신생독립국의 유엔 진출이 증가하며 유엔의 대한반도 관여 또한 영향을 받았다. 영연방 국가들은 ‘2대 원칙’의 수정 또는 철회, 북한·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언커크 개조 등을 주장하며 미국과 마찰을 빚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이 ‘2대 원칙’을 유엔의 공식적 입장으로 관철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유엔 참전국간 균열은 현실이 되었다.
유엔 참전국의 균열은 군사적 차원에서도 나타났다. 정전 상태가 장기화되며 영연방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엔군이 연락장교단만을 남긴 채 철수하고 오직 태국과 터키만이 전투 병력을 유지했다. 미국은 태국군·터키군의 주둔 비용 대부분을 부담하며 이들의 지속적인 주둔을 확보했으나, 유엔군의 균열과 축소는 유엔의 분단 관리에 잠재적 위험이 될 수 있었다.
3장에서는 1960년대 초·중반 세계적 차원의 비동맹·중립주의 확산 속에서 유엔의 정치적·군사적 관여가 본격적으로 균열을 보이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1960년대 들어 유엔 내에서 신생독립국은 수적으로 증가했고, 비동맹운동을 중심으로 정치적 결집을 시도하며 강대국 지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유엔의 구조적 변화로 미국과 한국이 유엔 결의를 통해 ‘2대 원칙’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1962년을 전후하여 ‘2대 원칙’은 사실상 형해화되었다. 또한 북한의 유엔총회 참석 가능성이 현실화됨에 따라 ‘초청 문제’가 ‘한국 문제’ 토의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영연방 국가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미국은 1964년 ‘한국 문제’의 자동상정 중단 방침을 세웠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 소련 등 공산 진영이 ‘한국 문제’ 토의에서 공세적 태도로 전환하고 비동맹 국가들에 여기에 호응하면서 유엔의 정치적·군사적 관여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북-중 결렬을 가속화하기 위해 언커크 해체와 유엔군 철수를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특히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과 더불어 유엔군사령부의 법적·제도적 약점을 파고들며 한국과 미국을 난관에 빠뜨렸다. 유엔군·유엔군사령부의 정당성에 대한 공격은 미국이 유엔의 이름과 권위를 빌려 구축한 동아시아 안보체제의 지속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4장에서는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 미국이 유엔을 활용한 정치적·군사적 관여의 청산을 모색하는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았다. 비동맹 제3세계의 성장으로 유엔의 대한반도 관여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진 미국은 1960년대 초부터 구상한 ‘한국 문제’ 자동상정 중단 조치를 1968년에 단행했다. 미국은 자동상정 중단을 유엔의 한반도 관여를 유의미한 수준으로 줄이는 조치로 이해했지만, 유엔의 상징성·권위를 포기할 수 없었던 한국 정부는 ‘재량상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유엔의 지속적인 관여를 강조했다. 1970년대 들어 본격화된 데탕트는 자동상정 중단 조치로부터 시작된 미국의 ‘탈유엔화’ 모색을 가속화했고, 미국은 1970년 말을 기점으로 재한 유엔 기구의 청산을 비롯해 유엔을 활용한 정치적·군사적 관여의 종료를 본격적으로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미국의 주도 하에 정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한반도에 대한 유엔의 정치적·군사적 관여의 핵심적 목적은 분단 상황의 ‘안정적’ 관리였으며, 미국과 남한이 유엔이라는 제도를 활용해 통일 논의에 대한 국제적 발언권을 장악하고, 남한 정부의 ‘유일합법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북한을 국제 사회에서 봉쇄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 이후 제3세계의 수적 확대와 정치적 결집으로 유엔의 세력 구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며 유엔의 한반도 분단 관리 구조 또한 결정적인 변화를 겪었음을 확인했다.
목차
"머리말
1. 문제 제기
2. 선행연구와 본 연구의 목표
3. 논문의 구성과 자료

一. 1953~1955년 제네바 정치회담의 실패와 전후 유엔의 한반도 분단 관리 구조 형성
1. 1953~1954년 유엔총회 '한국 문제' 토의와 제네바 정치회담의 전개
1) 7,8차 유엔총회 한국 정치회담 논의와 미국 인도의 외교적 대결
2) 제네바 정치회담과 유엔의 '권위' 논쟁
2. 1954~1955년 유엔의 '한국 문제' 연례 토의의 제도화
1) 9차 유엔총회와 한반도 통일 '2대 원칙'의 확립
2)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개편 논의와 그 귀결

二. 1955~1960년 유엔의 대한반도 관여의 지속과 동요
1. 1955~1957년 한국과 미국의 대유엔 외교
1) 한반도 통일 '2대 원칙'의 재확인과 미국의 언커크 활용 계획
2) 한국 정부의 유엔 가입 운동과 소련의 남북한 동시가입론 제기
2. 1957~1960년 유엔 참전국 간 동요와 갈등
1) 미국 영연방의 대립과 '2대 원칙'의 동요
2) 주한 유엔군의 철수와 미국의 대응

三. 1960~1967년 비동맹 중립주의 확산과 유엔 분단 관리 구조의 균열
1. 1960~1964년 유엔 내 신생독립국의 급증과 '한국 문제' 논의 구도의 변화
1) 미국의 '2대 원칙' 수정 모색과 남북한 조건부 동시초청안의 등장
2) '2대 원칙'의 형해화와 '절차 문제'의 핵심 쟁점화
3) 한국 미국 영연방의 자동상정 중단 합의
2. 1964~1967년 유엔 분단 관리 구조의 균열 심화
1) 공산 진영의 대유엔 외교 공세와 한미의 대응
2) 칠레 파키스탄의 언커크 탈퇴 시도
3) 유엔군사령부 주일유엔군지위협정 유지 문제의 쟁점화

四. 1967~1971년 유엔 분단 관리 구조의 청산 모색
1. 1967~1968년 유엔총회 '한국 문제' 자동상정 중단 결정과 그 귀결
2. 1968~1971년 데탕트와 한반도 문제 탈유엔화 모색
1) 24차 25차 유엔총회 '한국 문제' 토의 전개 과정
2) 미국의 재한 유엔 기구 청산 검토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