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불확실성을 지닌 국제정치 구도에서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택한 안보전략은 때로는 공세적인 것으로, 때로는 폐쇄적인 것으로 설명되어져 왔다. 안보전략을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치‧목표를 지키기 위해 대응하는 방식의 총체적 합”이라고 정의한다면, 또한 존립요소에 대한 위협의 배제를 넘어서 존립요소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의 확장이 ‘안보(se-curitas)’의 본질적 의미라고 한다면, 북한의 안보 노선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전략적 자율성 추구와 내부에서의 자기 존재 강화를 위한 정치성 조정으로 함축된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안보관은 국방정책에 관통되어 군의 사명과 임무, 역할에 특정한 명제를 부여하게 된다.
본 연구는 북한군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존재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정체성’이기 때문에 북한군 분석에 있어서도 그 기원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민군은 창군 시기에 갖춘 특유의 속성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가, 변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인가. 이같은 문제의식에 따라 인민군의 정체성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정체성의 변화 양상을 관찰하고자 하였다.
두 가지 이론적 틀로 북한군을 개념화하였다. 우선, 사회주의체제 군부 분석 이론을 적용하여 북한 정규군이 가진 사회주의군부로서의 공통된 특징을 도출하였다. 다음으로 집단정체성 이론을 통해 조선인민군이 가진 자기만의 색채를 파악하였다. 정체성이론을 적용한 이유는 군 집단 또한 여타 존재들처럼 타자와의 관계와 구조 인식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만들어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론적 고찰을 바탕으로 도출한 북한군의 정체성, 즉 사회주의군부 특색을 원용으로 삼으면서도 북한의 안보전략을 고수할 때 응집되는 특성을 두 가지로 특정하였다. 대외로부터 독립성을 추구하는 자율적인 성질(autonomy)과 외부요인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조정된 정치적인 성질(politicality)이다. 이 속성들은 북한군 성격 형성단계(1945~1969)에 대한 관찰을 기초로 규정되었으며, 시간적 범위는 기존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북한군 특성을 참고하여 설정하였다. ‘자율성’과 ‘정치성’이 국내외 환경 변화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해왔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건군절 계기 공표된 발화를 지표로 삼았다. 인민군의 시원과 발전상을 건군절이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곧 인민군의 존재방식, 역할, 임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연구의 종적 범위는 세 시기로 대분했으며 다음의 함의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정체성 태동기(1945~1969)는 자율성과 정치성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다. 소련·중국 등의 요인이 자율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외부와 결탁된 세력의 배제는 정치성을 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외부의 지원·개입에 대한 반작용이 자율성 추구로, 군 내 정치적 기반 확보가 정치성의 제도적 확립으로 이어졌다. 둘째, 정체성 변화 1기(1970~2011)는 자율성과 정치성이 모두 강화됐다. 정치권력의 국가운영방식이 유일지배체제로 확립되는 시점을 전후로 이같은 경향이 부각되었다. 2월 8일에서 4월 25일로 건군절을 변경한 것은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정통성을 정립, 정치성을 획득하려는 의도인 동시에 외부집단에 대한 역사적 우위를 점유, 자기 확장성에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자율성을 추구하려는 시도이다.
정체성 변화 2기(2012~2023)는 김정은 집권 시기와도 일치하는 바, 자율성은 강화된 반면 정치성은 약화됐다. 권력의 추가 군에서 당으로 이동하면서 정치성이 축소되었다. 안정적인 군권 확보 및 정치권력 위상의 구축을 위해 제기된 정치성 희석 작업은 조직·인사 개편을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동시에 군사문제의 당 주도성은 전략무기 운영 결정권이 통수권자에게 집중된 국방·안보정책으로 나타나, 야전군 중심의 전통적 군부 권력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결정적으로 ‘핵’을 중심으로 한 김정은식 군 독트린이 공표되어 자율성이 재정립되었다. 이 시기 인민군의 정치성은 선군을 삭제함으로써 희박해졌고, 완성형 핵독트린을 제시함으로써 자율성은 농후해졌다.
군은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특수한 목적을 지향하는 집단으로, 부여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정체감이 인위적으로 꾸며져 강조된다. 인민군 역시 북한의 안보전략에 적합하도록 발현되는 정체감이 있을 것이다. 약 60년간의 연구범위를 통해 파악한 북한군의 정체성은 일정한 표상을 지니고 있었다. 자율성은 전 시기를 아울러 원형의 값보다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는 북한군의 비합리적 행동 양상을 행위자의 맥락에서 이해하게 했다. 지도자별로 달리 발현되는 정치성은 역으로 집권 세력이 어떤 군사전략을 구사할지 유추하게 했다.
본고는 북한군을 형성케 한 구조적인 요인과 이를 인지하는 행위자들의 시각에 따른 구성주의적 관점을 기반으로, 인민군 정체성이 확장되거나 유지되며 때로는 희미해지거나 견고해지는 변화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북한체제가 겪은 여러 사건과 대외 정세는 정치체제뿐 아니라 정체를 보위하는 군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는 북한사회의 정태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 내부에서의 동태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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