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948~1960년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이 한국정부의 대미외교로 전개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한미관계에 미친 영향을 검토했다. 본고에서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에 주목한 이유는 한미동맹이나 한미관계를 다룬 기존연구들이 동맹의 수립과정과 그 후에 전개되는 한미갈등의 원인, 동력과 성격을 충분히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이 개인적인 구상을 넘어서 한국정부의 대미외교정책을 상당 부분 규정했으며, 국제정세 및 미국 국내정치의 변화에 따라 내용과 논리를 바꿔가며 한미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분석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승만의 대미외교를 외교술이나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파악하던 기존연구사를 넘어서, 보다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갖는다.
본 연구가 분석한 바,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은 무력통일 노선을 추구할 수단이자 미국의 확고한 지원을 얻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미국의 군사기지 역할을 하면서, 한국군이 미국의 반공전선을 위해 싸우는 역할을 맡길 원했다. 그래야 미국이 일본 대신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정책을 펴면서 한국을 최대한 지원하고, 무력통일까지 후원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미동맹의 수립은 중요한 문제였지만, 이승만은 나아가 한미동맹을 통해 자신과 한국의 위상을 증진하고자 했다.
반면 미국은 한국의 군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미국의 대한정책은 한국의 안정화를 목표로 했다. 이승만과 미국의 입장 차이는 이승만 정부 시기 내내 한미갈등의 주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한미동맹의 수립이 이뤄졌지만, 양자의 입장 차이는 다양한 형태의 충돌로 이어졌다. 한국이 미국의 원조와 안보 공약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양측의 충돌은 한국의 국익에 해를 끼쳤다.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이 미국과 충돌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때로 한국의 관료와 이승만의 사설고문단은 미국과 타협했다. 1953년 이승만-덜레스 회담 시기 변영태, 김용식, 로버트 올리버의 미국 측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 수용이나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 시기 변영태와 올리버의 남북한 총선거안 타협, 1957년 한국 내각의 한국군 감축 추진이 그 예시였다. 이들은 한국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때로 이승만의 지시와 미국의 제안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구상을 기초로 한미동맹의 내용과 성격을 바꾸고자 시도했고, 동맹에서 한국의 군사적 위상 증진을 위해 한국군을 최대한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승만의 한미동맹 구상과 국정운영은 항상 군사력 유지에 초점을 두었고, 1950년대 후반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려는 한국관료들의 노력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이승만의 정치적 독주와 한국경제의 악화는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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