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의 영속성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객관적 지표로도 그리고 실제로도 인민대중의 ‘인내(忍耐)한계점’을 훨씬 넘어선 듯 보이는 국내 상황이 꽤 오랜 시간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인민대중이 여전히 정권의 협력자이자, 지지자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코(Foucuault)는 ‘통치성(governmentality)’을 ‘(피통치자)의 행위를 일으키는 (통치자)의 행위(the conduct of conduct)’이자 ‘통치의 기술(technology of governance)’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국민의 욕망, 목표, 관심과 신념에 작용하고 그 행위를 형성하는 통치성이 특정 사회에서 작동 가능하게 해주는 통치전략을 “사법·주권적, 규율적, 조절적(regulatory) 속성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푸코의 논리를 전제한다면 북조선의 영속성은 곧 강력한 통치성을 만들어낸 특별한 통치전략에 기반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밸리(Niccolo Machiavelli)조차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주장하며 통치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듯, 인민대중이 강력한 정치세력이라는 논리를 전제한다면 북조선 사회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이 논리의 적용은 예외일 수 없다. 물론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와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 등과 같은 학자들은 대중을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지하고 이기적인 유럽의 ‘리스크(risk)’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마저도 인정하듯 대중은 마지막 까지 살아남을 권력이며 ‘역사는 이성의 확대와 진보에의 행진을 통해 발전하며 결국 합리적인 인간 정신을 통해서 진보한다는 주장을 부인할 순 없다. 여전히 인민대중은 미숙하거나 한계를 갖는 권력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 의한, 그들 스스로를 위한 역사를 발전시켜 온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중을 상대해야 했던 통치권력의 통치전략은 고도화되었다. 이때 등장했던 것이 바로 폭력과 규율이라는 전략의 비합리성을 넘어 합리적으로 인민대중을 설득하는 기제로 기획된 조절전략이었다. 조절전략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전략이며, “인간들의 복락을 국가 유용성으로 만드는 것, 인간들의 행복을 국력 자체로 만드는” 전략”이다. 따라서, “조절전략은 생명정치(bio-politics)나 경제적 통치의 속성”을 가진다. 북조선의 통치권력 역시 폭력과 규율, 그리고 조절이라는 3가지 통치전략을 동시에, 하지만 필요에 따라 강도를 조절하며 구사해 왔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해방 직후 김일성 정권이 ‘인민의 국가’, ‘인민정권’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내세워 사회주의 체제 안으로 인민대중을 불러 들이는데 주로 활용했던 것은 폭력과 규율보다 오히려 조절이라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풍요’와 함께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대변하는 가장 강력한 조절전략의 하나로 추진되었던 것은 바로 사회주의식 공간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북조선은 이러한 사회주의식 공간을 국가 건설 계획안에 적극적으로 적용할 수 없었다. 국가라는 대공간 전체를 사회주의식으로 재구성할 만큼 충분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가장 강력한 기반인 인민대중의 지지와 협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인민대중의 기대에 조응하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따라 부족한 재원의 한계를 넘어 ‘인민의 국가’, ‘인민정권’으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이러한 체제의 국가 지향을 실현해 나가는 통치권력으로서 김일성 정권의 정당성을 보여줄 수 있는 거점을 기획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인민대중의 일상 속에서 삶과 괴리 없이 작동하는 문화공간이었다.
특히 해방 직후 김일성 정권은 인민대중이 주체가 되는 소조운영형 문화공간의 전사회적 확대를 강도 높게 추진하였는데 이 공간이 인민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강조했던 정권의 지향과 국가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구락부, 민주선전실 등과 같은 소조운영형 문화공간을 러시아의 프롤레트쿨트(Proletkul't)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김일성 정권이 당시 이 공간들을 “인민의 손에 의하여 인민과 함께 성장" 하는 공간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국가 건설의 핵심 전략으로 상정되면서 구락부, 민주선전실과 같은 소조운영형 문화공간은 북조선 전역에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전쟁승리와 사회주의 수호라는 구호에 철저히 복무해야만 했던 문화예술은 분단된 북조선에서 필연적으로 사상교양의 거점이라는 공간 정체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전후 복구와 국가 재건을 위해 강력한 국가 동원과 경제 정책이 추진되면서 소조운영형 문화공간은 인민대중의 자발적 헌신과 조직적 동원을 추동하는 군중문화사업의 거점으로 변모해 갔다.
1950년대 중반이후, 중공업 우선정책이 가져온 잠재적 위기와 함께 북방 3각 관계에도 균열이 생겼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락부와 민주선전실은 인민대중의 문화생활을 위한 장소라는 정체성보다 “대중 정치사업과 군중문화사업의 거점"이라는 정체성에 몰입되어 갔다. 이에 따라 구락부와 민주선전실도 재구성되었다. 특히 농촌 민주선전실이 농업협동조합단위로 설치되면서 크게 확대되었는데 이는 ‘농촌 경리의 사회주의 협동화’가 추진되면서 발표된 내각 명령 제74호(1958.08.01.)에 따른 것이었다. 농촌 협동화를 성공적으로 완성·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실질적 증산을 위한 선진적 농업 기술을 전파하며, 경험과 의견을 교환하는 거점이 필요했던 것은 물론이고, 변화와 노동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휴식과 오락을 위한 기획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외형적 성장과 달리 잠재적 경제 위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던 1960년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으로 내세웠던 물질적 보상이 인민대중에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김일성 정권은 문화회관을 재호명했다. 경제를 대체하여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대변할 수 있는 ‘예술의 나라’라는 또다른 국가 정체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지구적 ‘혁명’의 분위기와 중공업 우선정책의 실패로 경제둔화와 인민대중 일상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김일성 정권을 위협하는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인민대중의 지지와 협력이 필요했던 김일성 정권은 중앙군중문화회관 아래 각 지역 군중문화회관을 재편하고 ‘예술의 대중화’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군중문화회관은 ‘군중예술’의 창작기지라는 임무가 부여되였으며 각 지역 군중문화회관은 군중예술을 인민대중에게 보급하는 보급소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13개의 주요도시에서 운영되었던 문화회관은 평양에만 180여개가 신설될 정도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해 구락부, 민주선전실과 함께 인민대중의 일상적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 또한 담당하게 되었다.
유일체계로의 전환이라는 전사회적 대전환을 통해 김정일 후계구도를 완성하고 정치·경제적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던 김일성 정권은 유일체계로의 전환을 공식화하면서 차원이 다른 공간 기획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바로 수도 평양을 유일체계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상징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수도 평양의 중심에는 “근로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있으며 사회의 모든 것이 근로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가장 선진적이고 우월한 사회제도”라고 김일성 정권 스스로가 규정한 유일체계의 지향을 드러내기 위해 대규모 공공건물들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 기획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상징적 소조운영형 문화공간 역시 새로운 차원에서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민문화궁전’과 ‘2.8문화회관’ 등과 같은 대형 복합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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