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북한과 중국 농업관리체계의 수직 방향의 변화 및 수평 방향의 차이를 비교분석함으로써 양국 농업관리체계 형성 초기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 특성은 이후 양국의 농업발전전략 선택과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있다. 이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역사적 제도주의이론 사회주의 체제 재산권에 관한 논의 제도 및 정책의 관계에 관한 논의 등을 이용하여 분석을 실시하였다. 본 연구는 북한과 중국의 농업관리체계 형성 과정에 따라 시기별로 구별하여 분석하였다. 첫 번째 단계는 북한과 중국에서 토지개혁을 통해 국가관리소농체계가 형성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토지개혁 과정에 대한 세부적 분석을 통해 국가관리소농체계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두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개조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집단화정책에 따라 농업경영에서 토지 및 생산수단에 대한 농민의 사적 소유권이 점차 집단적 소유로 전환되고 잉여농산물에 대한 처분권 및 농업생산에 대한 관리권도 집단으로 이양되었다. 농업생산 관리 및 농업잉여 분배 과정에서 국가가 상대하는 주체는 소농에서 협동농장 혹은 합작사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 농업관리체계의 형성시기이다. 집단화의 전면적 진척에 따라 북한에서는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한 군협동농장관리체계가 중국에서는 인민공사체계가 각각 구축되었다. 협동농장 또는 공사는 공장처럼 농민들의 생산과 생활을 국가의 계획체계에 완전히 포함시켰고 토지와 생산수단에 대한 농민의 재산권은 모두 집단으로 이전되었다. 상술한 세 단계를 통해 국가권력이 농촌으로 점진적으로 침투했지만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다. 제도적 요인과 외부환경의 제약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각 급 관료 및 농민의 저항도 받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과 중국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갖춘 농업관리체계를 형성했다.토지개혁 시기 이 시기에 북한과 중국은 국가 전제권력(DP)을 이용하여 봉건사회의 토지 소유제도를 폐지하고 토지에 대한 농민의 사적 소유권을 부분적으로 확보해 주었다. 농민은 생산결정권 토지 및 농산품 처분권을 완전하게 보유하지는 못하였고 때로는 농업생산에 대한 국가의 동원에 부응하기 위해 노동력 사용권까지 박탈당하기도 했다. 국가는 생산계획을 통해 농업생산을 관리하고 수매 및 현물세(농업세)를 통해 농업잉여를 장악하였으며 행정 및 당 조직 건설을 통해 농촌사회 말단까지를 통제했다. 즉 국가는 정치적 강제력에 이용하여 농민에게 토지를 분여했으나 이와 동시에 농민으로 하여금 사적 권한 일부를 국가에게 양도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농업관리체계는 국가지도하의 소농관리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북한과 중국 농업관리체계의 차이는 모두 토지개혁의 결과 즉 토지소유권과 관련이 있었다. 북한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하였지만 분배된 토지의 매매·저당·임대차 등을 일체 금지하였다. 반면 중국은 농민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 사용권 수익권 및 처분권 등을 완전히 인정하였다. 비록 토지의 자유거래가 중국에서 농촌 토지의 대규모 합병을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재산권의 완전한 인정은 구해방지역 지도자들의 반발을 일으켜 결국은 농업 집단화의 조기시행을 야기하게 되었다. 북한의 경우 토지 처분권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안정적 식량정책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토지개혁 이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자작지의 매매 등에 제한을 두지 않은 정책은 농민층의 재분화를 조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에 대해 북한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농업협동화를 통해서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농촌발전노선의 조정은 생산조직 행정관리 그리고 이익분배에서 국가관리범위의 확대로 나타났다. 한편 북한과 중국은 농업 발전의 경로와 관련하여 다양한 국가운동을 발기하였으며 당 사업 시스템으로 국가의 정무 관리시스템을 간섭하는 거버넌스 모델을 구축하였다. 중국의 경우 토지개혁 동원과정에서 계급투쟁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북한에 비해 중국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조성하는 데에 치우치는 경향을 가졌는데 그에 따라 중국에서 대중운동은 ‘과두정치의 철칙(an iron law of oligarchy)’에 빠짐으로써 국가가 운동을 통해 초월적 방식으로 현대화를 실현하려고 취지를 벗어나는 경향도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중국에서 대중운동은 정당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심지어는 국가와 사회를 격동의 국면으로 몰아넣고 당과 정부의 농촌조직 기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사회주의개조 시기 이시기에 북한과 중국은 농업과 농민을 점차적으로 사회주의 생산·조직 체계에 묶게 되었다. 농업 집단화는 잔존하는 농민의 사적 소유권을 완전히 소멸시켰는데 농민의 주요 재산을 협동조합(북한) 또는 초급합작사(중국)에 귀속시켰다. 토지와 생산수단은 소득 분배의 근거가 되지 못하였고 오직 노동에 의한 분배만이 이루어졌다. 농업생산에 대한 농민의 소득처분권 양도권 관리권 등은 협동조합 또는 합작사로 이양되었던 것이다.이 시기 북한과 중국 농업관리체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개별 농가를 급속히 협동조합 또는 합작사에 가입시킨다는 것이다. 양국은 토지개혁 시기 전제권력에 의해 농민을 동원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세금을 감면하는 방식으로 농민이 협동조합 또는 합작사에 가입하도록 이끌었다. 농업 집단화과정에서 기능과 권한의 집단으로의 이전은 협동조합 또는 합작사에 더 많은 이익분배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중국의 극단적 정책전환 및 치열한 계급투쟁은 농업생산을 저하시키는 동시에 농업합작사 제도의 취약성이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일부 농촌 기층간부는 정부가 허용하는 ‘포공포산’제도를 활용하여 농업생산에 청부제도를 도입하였다. 정책 정돈시기에 일부지역에서 가내부업자 수공업자 및 노동력이 부족한 농가는 합작사에서 대규모 퇴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농민과 농촌 기층간부는 농업 집단화제도의 취약성을 체감하였고 농업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또 다른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농업집단화가 드러내는 폐단에 대해 북한 당국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접근을 취하였다. 우선 유상통합 및 고립정책으로 부농의 협동조합 가입 문제를 처리했다. 둘째 강압적 현물세 징수 및 양곡수매로 인해 1954년 말~1955년 초에 일어난 기근에 대해 북한 당국은 현물세 감면 및 수매정책 후퇴 조치를 취하였다. 또한 일부 농민은 협동화에 대해 저항행동을 전개했지만 이러한 저항행동은 대부분의 경우 산발적이고 비공개적인 적대활동으로 표출되었다. 전반적으로 북한의 농업관리체계는 토지개혁 시기의 안정성이 사회주의개조 시기에도 유지되었다.사회주의농업관리체계의 완성 시기 집단화운동 이후 양국은 공산주의 사회로의 전환문제에 따라 농업관리체계를 재구성하였다. 이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국의 농업관리체계는 계속되는 심각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동안 만들어진 관리체계로부터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북한과 중국 농업관리체계의 발전에서 이정표적인 시기였다.이 시기 북한과 중국의 농업관리체계는 더욱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는 소유제 전환 방식에 대한 양국 지도부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업집단화 이후 북한과 중국은 소유제도 전환방식에 있어서 북한은 ‘국농설’의 방식을 중국은 ‘융합설’의 방식을 각각 채택하였다. ‘국농설’은 협동농장이 국영농장과의 통합을 통해 신속하게 소유제의 전환을 이루는 반면 ‘융합설’은 집단적 소유에서 전인민적 소유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방식이다. 그렇지만 실제의 정책 집행결과를 보면 중국은 북한에 비해 훨씬 급진적이었으며 또한 양국은 모두 기존의 제도 설정을 수정하였다. 북한은 전인민적 소유를 특징으로 한 국영종합농장 설립을 추진하는 방향으로부터 집단적 소유에 기반을 둔 군협동농장관리체계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중국은 원래 인민공사를 통일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으로부터 생산대를 기본단위로 한 3급 소유제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사회주의개조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국 농업정책의 주기적 변화는 농민과 기층관료에게 정책을 자신들의 이용에 맞추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인민공사 제도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기층간부는 농민과 인민공사제도를 파괴하는 공조(혹은 공모共謀) 관계를 형성하였고 심지어 농민의 저항행위가 관료체제를 통해 상향 침투하기도 했다. 북한의 경우 농업 정책 및 농촌 조직구조의 안정성은 계속 유지되고 이에 따라 농민 및 기층간부에게 정책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지 못하고 집단생산 이외의 다른 대안이 제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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