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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북한의 자주연대 외교 연구 : 북한-베트남-쿠바 연대 외교를 중심으로

A Study on the Diplomacy of North Korea’s Independence Solidarity during the Cold War - Focused on North Korea-Vietnam-Cuba Solidarity Diplomacy

상세내역
저자 김상범
학위 박사
소속학교 동국대학교
전공 북한학과 북한체제
발행연도 2020년
쪽수 498
지도교수 고유환
키워드 #김상범   #북한   #베트남   #쿠바   #자주   #연대   #자주연대   #민족해방투쟁   #자주노선   #베트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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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역
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냉전기 사회주의 약소국이었던 북한-베트남-쿠바의 소위 ‘자주연대(Independence Solidarity)’라는 초국가적 행위(transnational activity)가 북한 외교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미소 중심의 냉전사’를 ‘약소국 중심의 냉전사’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학계의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약소국들이 미소라는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어떻게 냉전을 내부화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본 연구에서는 기존 냉전기 외교사에서 철저히 간과되어왔던 사회주의 약소국 북한 베트남 쿠바가 어떻게 생존해 왔는지 살펴봄으로써 약소국 중심의 외교사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이러한 사회주의 약소국의 연대에 대한 학술적 논의의 부족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본 연구는 북한-베트남-쿠바‘자주연대’라는 사회주의 약소국들 간의 초국가적 행위에 대해 주목하였다. 본 연구는 ‘자주 연대’를 ‘자주를 추구하는 약소국 간의 연대’로 개념화하고 이것이 냉전기 사회주의 약소국들인 북한 베트남 쿠바가 자신들이 처한 체제 위기에 공동 대응 관리하기 위한 초국가적 공동 생존 전략이었음을 밝혔다.‘자주연대’의 핵심은 북한 베트남 쿠바 간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체제를 어떻게 안전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구상이었으며 위기를 공유하고 위기 상황시 상호의 국가 안보에 기여함으로써 체제 생존과 독립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주연대’는 북한 베트남 쿠바의 국가 안보전략이었으며 또한 국가 발전전략이었다. 북한 베트남 쿠바는 자주연대를 통해 상대의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인식하며 위기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온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하였다. 냉전기 강대국 간 핵전쟁 가능성의 현실화로 설명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으로 인식되었던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북한과 베트남은 쿠바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북한은 당시 경제 기술적 지원을 베트남은 선전선동을 통한 대쿠바 정신 도덕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으로 격화되었던 베트남전쟁에서 북한은 공군조종사 파견 수천 만 루블의 경제적 무상지원 108차례의 정부차원의 성명 베트남 유학생 유치와 교육 호지명 사망 전 하노이의 비밀 방문 등을 통해 ‘동북아에서의 베트남’을 자처했다. 쿠바도 지대공 미사일 운용 기술 전수 게릴라 작전 공유 1973년 9월 카스트로의 하노이 방문 등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베트남’을 자처했다.이들은 1966년 1월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인민단결회의를 개최해 이 결과로 3대륙 인민단결기구를 구성함으로써 기존 3세계의 주요 관심사였던 경제발전 인권 평화 차별 반대 등의 문제를 ‘민족해방투쟁’이라는 혁명적 아젠더로 단일화하였다. 북한 베트남 쿠바를 중심으로 개최된 이 회의에서 회의 참가국들은 3대륙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을 기존 프로레타리아 계급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과 동등한 역량으로 인정하는 소위 ‘사회주의 혁명이론의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김일성은 3대륙 인민단결기구 기관지인 뷸레틴 트리콘티넨탈 창간호에서 이를 세계 2대혁명 역량으로 개념규정함으로써 세계혁명의 국제적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를 통해 북한 역사상 가장 거칠고 단호한 어조로 중소로부터의 완전한 자주를 선언하였으며 중소가 지향하는 사이비 사회주의와의 투쟁을 선언하였다. 북한은 베트남과 쿠바 혁명 보위를 북한 대외전략의 핵심전략으로 공식 선언하였으며 국제노동절 행사의 성격도 민족해방투쟁 강화 행사로 변질시켜버렸다. 북한 베트남 쿠바는 강화된 자주연대를 발전시키고 자신들의 혁명전통을 강화하기 위하여 혁명전통 일체화 전략을 추구하였다. 북한과 베트남 간에는 1950년 3월 19일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대미항전 승전 기념일과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일의 의미를 동치시켰다. 북한과 쿠바는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와 1953년 7월 몬카다 병영 습격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정신과 카스트로의 마에라 시에스트라 정신과 일치시켰다. 이는 이들 국가들 간 공동의 사상과 목적으로 단결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68년 1월 푸에블로호 나포와 1969년 4월 EC-121기 격추 사건으로 인한 ‘제2의 한국전쟁기’에서 베트남과 쿠바는 유일하게 북한을 자주 국가와 사회주의 강국으로 칭송하며 북한의 정당한 자위권 조치임을 강조하며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는 북한에게 체제 내부 강화를 위한 명분과 지원을 제공하였다. 북한은 이 위기를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응하였다. 북한은 푸에블로호 나포 직후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승리를 대대적으로 부각시키며 자신들의 국가시스템을‘인민들에 의한 전쟁’을 위한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였다. 북한은 푸에블로호 위기를 ‘제2의 보천보 전투’로 개념화하며 반제 반미투쟁 의식을 강화하는 한편 1968년 2월 16일 김정일의 생일에 김일성 혁명가계의 위대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북한 역사상 최초로 김일성을 ‘조선의 태양’으로 칭송하며 혁명적 수령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후계자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동년 9월 9일 정권수립 20주년 기념식에서 북한은 세계혁명 전략으로 미제의 각 뜨기 전략을 제시하며 중소와 다른 세계혁명의 길을 걷고자 하였다.베트남의 경우 푸에블로호 나포로 인한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북한에 공군을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쿠바도 피로써 북한을 지원하고 언제라도 지원병을 파병의사를 천명한 것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 사회주의 약소국들은 ‘완전한 이익의 일체화’를 위해 체제 생존을 위해 전국가적 역량을 투입하였다. 북한은 EC-121기 격추 사건 때 방어적 성격의 선제적 승리강압론을 완성시키며 힘 억지 그리고 도발에 대한 북한의 신념체계를 완성시켜 나갔다. 다시 말해 소규모 폭력과 충돌이 억지를 생성한다는 논리로 이것은 현재 북한의 도발적 언행과 무력 행사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이론적 단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중소 등 강대국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소규모 폭력과 호전적 언행이 자신들의 자주성을 보장하고 이들로 하여금 북한의 국가이익에 ‘긍정적 관여’를 할 수 있는 인식의 기초를 형성시켰다. 이는 북한이 ‘호전적 자주’를 통해 주변국들이 북한의 이익에 관심가지게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자주연대를 통해 북한은 자주의 자기 확장성을 인식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북한은 자주연대를 ‘자주 욕구’의 대외적 표출의 계기로 활용하였으며 자신들의 독립과 자주를 위한 더 높은 수준의 대내외 자주 정책을 추구하였다. 북한은 국제정치에서 고립 국내발전으로 설명되어지는 소극적인 ‘자주’의 개념을 적극적이고 갱신이 가능한 복수적 개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주의 정당성 재갱신 기제는 북한을 스스로 사회주의 강대국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자주연대를 통해 길러진 ‘힘’을 바탕으로 중소와의 견제와 균형의 외교정책을 추진하며 자연스럽게 제3세계에서 리더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북한은 자주연대를 통해 대외관계에서 자주와 관여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을 만들어냈다.북한은 자주연대를 통해 기존 소련과 중국이 독점했던 ‘혁명과 해방의 요새’라는 강대국의 국가 역할을 이들과 공유하며 대외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사상 경제·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다시 말해 약소국임에 불구하고 자신들을 강대국으로 인식함으로써 ‘약소국이지만 강대국 지향 외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것은 1970년대 북한이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지역의 민족해방투쟁에 적극 개입하고 지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약소국이지만 강대국 지향 외교는 현재 우리 정부가 북한을 상대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자주연대’는 비록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언어도 통하지 않았지만 ‘민족해방투쟁’이라는 ‘단일한 혁명적 언어’를 공유했음을 의미했다. ‘자주연대’는 현재 북한 체제의 작동원리와 대내외 행동 패턴을 완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자주연대는 북한에게 ‘방어적 차원의 선제강압론’이라는 그들만의 고유한 위기 관리론을 형성시켰다. 본 연구는 위기 상황에서 방어적 차원의 소규모 폭력이 더 큰 충돌을 예방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시키는 전략으로 규정하고 이것이 종국적으로는 대화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음에 주목했다. 자주연대는 냉전기 북한의 제3세계 외교에 큰 성과를 얻게 만든 기초이자 소중한 외교적 자산이었다. 자주연대는 북한의 제3세계관을 강화·발전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북한의 제3세계 외교 강화·발전은 주변 강대국 외교에서 북한이 자주권을 가진 자율적 행위자로 인식되게 만들었으며 이들 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이니셔티브와 정치적 지렛대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의 대제3세계 외교 강화·발전은 북한이 중소를 넘어 진정한 혁명국가 및 국제주의자로 인정받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목차
제1장 서론 제1절 연구 배경과 목적 제2절 선행연구 검토 5제3절 연구 방법 171. 연구 대상 및 범위 172. 연구 방법 193. 연구 자료 204. 연구 구성 26제2장 이론적 배경 28제1절 자주연대의 개념 정의 28제2절 자주연대의 형성 배경 361. 역사제도적 배경 식민지 혁명 전쟁 그리고 분단 362. 이념적 배경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46제3절 자주연대의 이념적 기초 531. 프로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집단 안보 532. 비동맹운동과 트리컨티넨탈(Tri-Continental) 59제3장 북한-베트남-쿠바 자주연대의 형성 69제1절 쿠바 미사일 위기 721. 쿠바의 대응 722. 북한의 대응 853. 베트남의 대응 10제2절 베트남전쟁-개전(1962-1965) 1071. 북한의 대응 정치도덕적 지원에 집중 1082. 쿠바의 대응 정치도덕적 지원에 집중 128제4장 북한-베트남-쿠바 자주연대의 발전 134제1절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인민단결대회 1341. 대회 개요 1342. 주요 결정 사항 143. 의미 1434. 활동 147제2절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 1601. 시기적 배경 베트남전쟁 고조 및 중소분쟁 격화 1602. 당 대표자회 개최와 베트남 쿠바 혁명 보위 선언 1683. 쿠바 정부대표단의 북한 베트남 동시 방문 1824. 1967년 5.1 국제노동절 행사-'민족해방투쟁절'로의 성격 전환 2145. 북한 정부대표단의 쿠바 방문 224제3절 베트남전쟁-확전(1966-1967) 2361. 북한의 대응 2362. 쿠바의 대응 28제5장 북한-베트남-쿠바 자주연대의 실천 300제1절 푸에블로호 나포 3001. 시기적 배경 제2의 한국전쟁 전야 3002. 푸에블로호 나포 및 석방 3143. 북한의 대응 3224. 베트남의 대응 3525. 쿠바의 대응 360제2절 EC-121기 격추 사건 3641. EC-121기 격추 사건의 배경 및 개요 3642. 북한의 대응 '방어적 차원의 선제 강압론'형성 3723. 베트남의 대응 3794. 쿠바의 대응 384제3절 베트남전쟁 협상 및 재확전(1969-1972) 3881. 북한의 대응 3882. 쿠바의 대응 43제6장 북한-베트남-쿠바 자주연대가 북한 외교에 미친 영향 437제1절 북한의 자주노선 강화 '사회주의 강대국' 인식 형성과 발전 437제2절 방어적 차원의 선제강압론 발전 445제3절 북한의 제3세계 외교 강화발전 비동맹운동 촉진 450제7장 결론 456제1절 연구 결과 요약 456제2절 연구의 시사점 한계 및 후속 연구 과제 461. 연구의 시사점 462. 연구의 한계 및 후속 연구 과제 467참 고 문 헌 47ABSTRACT 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