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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연구 : 북한정권 수립과정에서의 허헌의 역할

A Study of the Heo Hun

상세내역
저자 홍현지
학위 박사
소속학교 동국대학교
전공 북한학과
발행연도 2021년
쪽수 388
지도교수 고유환
키워드 #홍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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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국문 요약


兢人許憲(1885-1951)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들 가운데 특별한 인물이다. 허헌은 일제 강점기에서 그가 변호사로서 교육가로서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8·15광복 직후의 해방공간에서 활동하면서 그의 정치적 성향에 있어, 중도적 좌파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월북하였다. 그러나, 허헌은 월북 전까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법조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등 여러 방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민족변호사다.
그의 정치적 활동 범위는 일제강점기에는 이른바 긍인·이인·가인의「3 인」변호사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가와 사회운동가에 대한 지원과 변론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3·1운동」재판에서는 유명한「공소불수리 신립사건」으로 일제 사법 당국에 일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1920년대 말에는「新幹會」중앙위원장을 지내면서 일제의 탄압에 맞서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허헌은 민족 지도자로서「8·15 광복」직전까지도 이른바「단파방송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는 등 그의 정치적 행보는 해방 후, 그가 월북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가「건국준비위원회」와「남조선 로동당」에서도 깊이 관여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활동에 근거하여 허헌이라는 인물을「양심적 ·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일컫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허헌은 일제치하에서 민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애국적 사회주의자 성향을 보이면서 단일 국가수립을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월북하여 북한정부의 수립을 돕고 활동한 인물로 오늘날 그를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공산주의자로 그를 폄훼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일제시대 해방 후까지 그의 성품으로 보아 매우 진지하고 침착한 행동으로 급진적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은 그동안 그가 참여했던「신간회」 활동에서부터 민족전선 좌우합작 그리고 단독정부 반대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관된 태도의 분명한 특징은 대체로 중도적 또는 좌·우 통합 지향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 그의 두드러진 특성으로 꼽을 수 있고.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향은 그는 곧 그가 원하는 사회적 가치는 계급보다는 민족이라는 과제를 중요시했음을 시사해주고 있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보여준 행동적 성격으로는 해방 후, 그가 보인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러한 점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허헌은 결국 월북하였고, 그 후, 허헌은 박헌영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젊은 김일성의 사상에 노선을 돌리고 북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의장에 취임하는 등 결국 북한 사회의 성립에 협조하면서「김일성 종합대학」 총장까지 역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하여 허헌은 비록 소련 의존의 길을 선택하지만, 그러나, 이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가 미국과 결별하게 된 것은 자신의 본의였다기보다는 미·소 냉전의 시작으로 그가 택해야 하는 정치적 행보는 어느 정도 강요된 선택이라는 측면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로서 한반도 남북 분단의 현실에서 허헌에 대한 부정적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먼저 허헌의 가계는 양천 허씨 판도좌랑공파 내 용진공(허징)파의 후손이다. 호는 긍인(兢人)으로 함북 명천 출생이다. 조상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 조정이 기울자 두 형제인 15세 허징과 허손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허징은 함경북도 명천으로 입북했고, 허손은 제주도로 낙남했다. 먼저 허헌의 출생부터 살펴보면, 그는 1885년 음력 6월 11일 함북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에서 향반인 경원부사 허추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허헌은 양천 허씨 15세 용진공 허징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허헌이 출생하고 성장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19세기 말 조선은 사정이 부패하여 그러한 패악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극히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조선왕조 시대의 정치적으로 부패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양반층의 횡포는 극에 달해 도탄에 빠진 민초들은「동학농민혁명」등 민란이 발생하는 등 내부적 모순이 축적되어 봉건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 있는 세기말적 현상으로 조선왕조는 붕괴되기 시작하는 조짐이 보였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혁명」등이 잇달아 발생하여 내면적으로 조선왕조의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세계 자본주의의 열강들이 다투어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는 등 특히 일본은 강화도 불평등 조약을 내세우며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며 조선의 운명은 외세에 의한 반식민지화의 길을 밟고 있었다. 또한 외면적으로는 일본과「강화도불평등 조약」의 체결, 구미자본주의 제국들과「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조선의 주권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허헌은 재혼 부인인 류덕희와의 사이에는 4남 3녀를 두었는데 허근욱,ᆞ 허선욱 딸 둘 , 허영욱 ᆞ허종욱 ᆞ허성욱ᆞ ·허기욱 등 아들 넷을 낳았다. 허헌 변호사는 해방 이후 남북분단과 냉전 속에서 북한정권에 합류했고, 그래서 남한에서는 금기시하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항일투사(抗日鬪士)로서 활동한 그의 헌신적인 생애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이러한 시기에 허헌은 민족변호사로서 애국적 민족지도자로서 민족주의적 사상을 굳건히 지키며 도탄에 빠진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헌신하였다.
허헌은「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일본「메이지(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08년 이른바 「광무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됐다. 그러나 경술국치를 당하자 ‘식민지배아래 변호사가 무슨 뜻이 있느냐’ 며 낙향해 사실상 은둔의 생활을 보냈다. 1919년의 「3·1 운동」은 만 34세의 허헌을 대표적 항일변호사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일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법 이론으로「3·1 운동」의 지도자들을 변호해 일제를 당황케 했다. 이 三一運動 재판에서 유명한 控訴不受理申立事件(공소불수리 신립 사건)으로 왜놈 사법 당국에 일격을 가했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의 첫째 아들 허영욱은 2015년 『나의 아버지 허헌』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북한에서의 허헌의 업적을 그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그려놓고 있다. 허헌의 첫째 아들 허영욱은 북한(北韓)의 대남사업 부서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곳은 공식적으로는 당내 대남사업의 대표부서는「통일전선부」로 남한의「통일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허헌이 남한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지만 허영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둘째 아들 허종욱은 후에 허종으로 개명하였는데 북한 사회에서 유엔북미대사와 아랍에메리트 북한대사, 그리고 경수로사업 북한 경수로 착공식에서 북측대표로 축사를 한 許鍾(허종·52)외교부 순회대사는 바로 허헌의 둘째 아들로 밝혀졌다. 그는 허종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 남한에 살고 있는 그의 둘째 누나 허근욱이 TV를 통해 공개적으로 증언한 바 있다. 그리고 셋째 딸 허선욱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초로 하프 연주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허선욱의 딸은 허문영으로 북한에서 이름 있는 지휘자로 그의 아버지 허재복의 뒤를 이어 그의 작은 아버지 허이복과 함께 음악 가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셋째아들 허성욱은 신병으로 일찍 사망하였고 넷째 아들 허기욱은 현재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허헌의 둘째 딸 허근욱은 북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념을 넘어 1950년 한국전쟁 중 1·4 후퇴 때 남편 박노문과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다가 2017년 3월25일 사망하였다. 후손으로 박일규 교수가 생존해 있다.
정리해보면 허헌은 북한에서 김일성을 도와 북한 정부수립에 기여하였고. 그곳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되는데, 북으로 월북한 그는 그 곳에서 1948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그리고「최고인민회의」의장(의회 의장)에 선출되고,「김일성종합대학」초대총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1951년 8월 16일 평북 정주에서의「김일성종합대학」임시교사(校舍) 입교식에 참석하고자,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났다가 홍수에 불어난 대령강 물로 인하여 그가 탄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그 당시 허헌은 김일성의 신뢰를 받을 만큼 북한사회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는 것은 물론 그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성운동가인 허정숙의 부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허헌에 대한 신임은 그가 직접 그의 시체가 든 관을 직접 메고 안장하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허헌은 북한 사회에서 최고의 위치에서 대접을 받고 1951년 9월 7일 평양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장례식을 마친 뒤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오늘날 한반도의 남북정세는 남북 분단 70여 년을 맞는 지금의 시간에 그 어느 때보다도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통일 조국을 염원하는 정치적 분위기가 괄목 성장하게 조성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가 내리고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데 그의 정치적 행보가 남북의 교량 역할을 하여 그로 인한 시금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이러한 시점에 그 어느 때보다도 허헌의 연구자들은 그를 계급보다는 늘 민족이란 과제를 중시했던 점도 분명한 민족주의자라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그가「좌파」와「북쪽」의 선택을 한 것은「중간파」의 여지를 없애버리는 냉전 체제하에서 나온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허헌의 평가에 대한 대부분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논자는 굳이 부정적 측면에서 본다면 허헌을 좌파적 성향의 사상적으로 통합적이고 개방적인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그의 평가로 마무리한다.
물론,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남북분단의 국면에서는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적 숙제가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부분으로 이와같이, 남· 북한이 단일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각기 정부를 수립한 때로부터 70년이 되어가는 현재, 한반도 정세는「미・중」양 강 구도가 국제정치의 기조로 자리 잡고있는 가운데 통일 한국을 위해 한국 외교가 처한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 논문 연구의 본래의 목적이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분단국가의 비극을 재조명하고, 앞으로의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이 역사적인 인물 민족 변호사 허헌의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목차
"제1장 서 론
제1절 연구배경 및 목적
제2절 연구방법 및 선행연구 분석 2
제3절 연구의 구성 5
제2장 출생과 가족관계 7
제1절 출생 및 시대적 배경 7
제2절 허헌의 가족관계 8
1. 허헌의 가계도 8
2. 부친의 사망 10
3. 허헌의 혼인과 결혼생활 13
제3절 일제 강점기 허헌의 활동과 사상 15
1. 민족주의자와의 만남 15
제3장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에서의 허헌 22
제1절 민족 변호사로서의 활약 22
1. 해방 이전 : 항일 민족주의자 23
2. 제1차2차조선공산당사건변호인 35
3. 조선정판사 위폐사건특별 변호인 49
4. 본격적 항일운동의 전개 53
제2절 분단이후 허헌의 활동 69
1. 분단초기 :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민족전선활동 70
2.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활동 76
제3절 월북의 배경 90
1. 장녀 허정숙과의 정치적 동지 90
2. 김일성과의 평양에서 극비조우 112
제4절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기간 허헌의 평가 132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기의 사상 133
2. 업적에 대한 논쟁의 관점 147
제4장 북한의 건국과 허헌의 역할 165
제1절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의 역할 165
1. 남북연석회의남한대표166 2. 최고인민회의 의장 171
제2절 법제위원회, 헌법제정위원회 위원 189
제3절 김일성 종합대학 초대총장 193
1. 전시 대학교 교육사업을 맡아 안고 196
제5장 허헌의 사망과 북한 주요 인사와의 관계 209
제1절 허헌의 사망과 애국열사릉안장 209
1. 허헌의 사망과 김일성주도 영결식 209
2. 애국열사릉 안장 217
제2절 북한 주요 인사와의 관계 229
1. 김일성 230
2. 김 책 242
3. 홍명희 248
4. 허정숙 253
제6장 결 론 262
부록
부록 1 265
부록 2 266
부록 3 267
부록 4 289
부록 5 322
부록 6 325
부록 7 328
참 고 문 헌 342
Abstract 352
** 허헌 일가 가계도 연보 366
** 허헌 일가 사진 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