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해방이후 북한의 사법치안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운용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며, 제도적 실체로서 사법·치안 조직의 개편과정과 법의 운용, 그리고 해방이후 한국전쟁 초까지 ‘반동분자’에 대한 대책과 처리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 내용을 네 가지로 나누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북한의 사법치안체제가 형성되기 전의 전사로서 군중재판은 해방직후 북한에서, 한국전쟁 초기에 남한점령지역에서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이 재판은 당시 인민의 ‘적’으로 인식되었던 일제부역자, 반동분자를 처벌하였다. 그리고 북의 사법치안체제는 군중재판을 자연스럽게 수용하였지만 남한의 군중재판은 체제내로 흡수되기 전에 북한군 후퇴가 시작되어 북한의 악명 높은 폭력적 재판기구로만 기억되어졌다. 북한의 사법치안체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차례 걸친 내부 숙청과 농민, 노동자 중심의 조직 충원정책, 참심원제도로 사법·검찰·보안 조직내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을 우선적으로 진행하였다. 두 번째 사법치안체제의 감시 기능과 예심 기능은 반소 반탁세력을 시작으로 반동선전선동자, 경제범, 정치범 등 시기별로 ‘반동분자’로 규정된 자들에 대한 대책과 처리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세 번째 미국과 극우반공체제로서의 남한의 존재는 북한 내부의 ‘반동분자’ 혹은 잠재적‘반동분자’에 대한 감시체제를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네 번째 소련철군을 계기로 북한은 정치보위국과 형법을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형법의 운용과 정치보위국의 활동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비로소 본격화되었다.
두 번째는『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은 법령은 아니었지만 반동분자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법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고,『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재판소·검찰소의 구성과 직무에 관한 기본원칙』제20조는 인민위원회와 인민을 위협하는 온갖 범죄와 ‘반동분자’를 처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제20조는 1946년 중반부터 1947년 초까지는 북한체제와 토지개혁 등 민주개혁 반대자와 서북청년단 등 남한관련자에게 ‘반동죄’나 ‘반동선전선동죄’등을 적용하는 법조항이었고, 1947년 중반부터 1948년까지는 월경안내, 물자이남반출 등 남한과 관련된 ‘반동범’들에게 적용되었다. 북한 형법은 헌법제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준비되었지만 1950년 3월이 돼서야 완성되었다. 형법의 기본적인 특징은 첫째 사법치안의 실무경험자와 법률전문가들이 노동당의 영향 하에 제정되었다. 둘째 형법의 ‘사회적 위험성’과 ‘유추적용’은 처벌상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 세 번째는 국가주권적대죄가 ‘반동분자’ 처벌의 근거가 되며, 특히 제79조는 한국전쟁동안 ‘반동분자’ 처벌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세 번째는 북한 국가형성과정에서 ‘반동분자’세력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첫째는 반소반탁세력이다. 둘째는 정부시책에 대한 반대세력 예를 들면 토지개혁 혹은 민주개혁 반대자와 정부 혹은 당내 부정·부패자 혹은 철직자 들이다. 세 번째는 1947-48년 인민경제체제 강화정책에 따라 경제범 중의 국가사회재산 약탈자나 훼손한 자들이다. 네 번째는 남한과 연계된 세력들로 특히, 1949년 이후 군사력 강화정책에 따라 남한과 연관 있는 정치적 ‘반동’범이 그들이다. 반동분자로 규정된 자들이 모두 처벌받은 것은 아니지만 이들 증 범법행위가 드러난 자 혹은 범법행위를 하려는 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네 번째는 한국전쟁 발발이후 남한점령지역에서는 세 가지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전시상태’가 선포되었는데 이때 가장 큰 특징은 전시범죄의 사회적 위험성이 평시와 질적으로 다르게 변경된다는 것이다. 특히 지방군정부에게는 전시형법에 따라 ‘반인민적이고 반동적이며 공화국에 적대되는 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 사법권을 주고, 각 지역 인민위원회의 보안대, 내무서원, 정치보위부원들과 일반재판소 혹은 도재판소, 군사재판소 등 사법치안조직들에게는 ‘반동분자’들을 체포, 심사와 분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둘째는 훈련된 수많은 사법·치안조직원들이 남한에 파견되었다. 세 번째는 ‘반동분자’에 대한 대책과 처리는 점령 초 자수 등 포섭과 색출정책을 병행하였으나 북한군 후퇴시기에는 형무소를 중심으로 ‘반동분자’학살이 진행되었다. 북한군 후퇴시기 대전형무소에 발생한 학살사건을 통해 형무소뿐 아니라 정치보위부가 있던 수도원과 내무서가 있던 경찰서 등에 수감되었던 자들이 9월 25일부터 27일 3일간 1400-1500명 정도 학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이 시기 남한의 일부 형무소와 내무서에서 비슷한 학살이 발생하였다. 즉, 1950년 9월 24일부터 30일 사이 형무소와 내무서에서 학살이 발생했다는 것은 위로부터의 명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와 관련된 상부명령 혹은 지시내용은 어떤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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