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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탈주민의 6.25전쟁에 관한 인식 : 입남후 변화와 정책적 제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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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오태봉
학위 박사
소속학교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전공 국제관계 안보전공
발행연도 2012년
쪽수 100
지도교수 김명섭
키워드 #오태봉   # 6.25전쟁   # 북한이탈주민   # 북한주민   # 조국해방전쟁   # 재북   # 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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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한 지 62년이 지났다. 6·25전쟁은 반만년 한민족사에 가장 큰 재앙을 남긴 동족상잔으로 기록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기반에서 갓 해방되었던 남과 북은 잿더미로 변했고, 청소한 사회기반 시설은 여지없이 파괴됐다.북한의 불의의 침공으로 시작된 6·25전쟁에는 남한의 자유수호를 위해 16개국 유엔군이 투입됐고, 공산진영을 보전하기 위해 중공군이 북한 측에 가세함으로써, 한반도는 외세의 이전투구(泥田鬪狗)장으로 변했다. 정전협정으로 말미암아 미완으로 종결된 6·25전쟁은 남북대결과 반목의 장이 되어버렸다. 현재도 남북 사이에는 서해북방한계선(NLL)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국지전이 지속되고 있으며, 결과 2010년 11월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로 대한민국의 영토가 공격받는 비극도 낳았다. 6·25전쟁은 한반도를 재난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를 이념적으로 분열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를 친미와 반미로 양분화 하는 잣대가 생겨난 것도 6·25전쟁의 골 깊은 상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에게 상흔을 안겨준 6·25전쟁에 대한 남과 북의 평가는 서로 다르다. 남한에서는 6·25전쟁에 대한 객관적·역사적 사실이 입증되어 “6·25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으로 기정사실화 됐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당국차원의 왜곡된 세뇌교육으로 “6·25전쟁은 미제의 사주를 받은 남조선괴뢰군의 북침전쟁”으로 인식되고 있다. 6·25전쟁에 대한 이러한 남북한 사이의 인식 차이는 한반도에 평화공존을 가져오지 못하고 예측불허의 대결적 요소와 함께 남북 교류와 협력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때문에 ‘6.15 남북공동선언’, ‘10.4 남북공동선언’ 으로 남북한 사이의 적대의식을 극복하고 대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한반도에서는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준비해왔지만, 북한의 남한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북한은 현재도 6월 25일을 ‘미제반대투쟁의 날’로 정해놓고, 평양의 ‘조국해방전쟁기념관’과 각 지방의 ‘김일성동지혁명사상연구실’에 전시한 사진 및 증거자료를 소개하며 교육하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과 정전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을 국가적 기념일로 정하고 청년대학생, 근로자를 통한 당 및 사회단체의 집회와 성토대회를 개최하여 미국과 남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핵개발 등 최근 벌어진 남북간 무력충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의 도발은 항시적으로 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고, 그 도발을 수행하는 북한주민과 군인들의 시대적 사명은 “전쟁을 도발한 미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남조선을 해방하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의 반미대남 적개심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안보관은 원만한 수준에 있지 못하다. 일례로 2005년 맥아더 동상철거 운동으로 온 사회가 친북(親北)과 반북(反北)으로 양분화 되어 심각한 이념갈등을 빚어 왔으며, 우방인지 적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되었고 남한주민 내에서도 남남갈등으로 화합이 어려운 현실이다. 2011년 4월 11일 행정안전부에서는 성인남녀 19세 이상 1,000여명의 국민안보의식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중·고생의 57.6%, 20대(19~29세)의 55.1%가 6·25전쟁 발발연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고,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잘 모르는 실정이다(행정안전부 2011, 조사). 더구나 폐쇄적인 북한을 탈출해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북한이탈주민(North Korean defector/refugee, 北韓離脫住民)은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에 대한 법률]에서 사용된 법률 용어이다.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에 대한 법률] 제 2조에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에 주소ㆍ직계가족ㆍ배우자ㆍ직장 등을 두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벗어난 후 대한민국 이외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통일부) 한국정부는 2005년 1월부터 ‘새터민’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선정, 공식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하지만 탈북자단체를 대표하는 북한민주화위원회(고 황장엽위원장)는 2007년 4월 16일 통일부에 공문을 보내“새터민이란 용어를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통일부는 2009년 5월‘북한이탈주민’으로 사용을 공포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북한이탈주민’으로 한다. 수가 2만 3천여 명에 달하고 있지만 이들이 6·25전쟁의 발발원인과 그 수행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의 남한사회 정착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과 국민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지만, 북한이탈주민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이 곧 남한주민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북한이탈주민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게 역사인식을 통한 정체성을 바로 심어주어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리매김하고 남북통일 후 사회통합,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한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입국한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은 6·25전쟁이 북침이냐 남침이냐에 대해 관심조차 없고 언론매체나 여론 등을 통해서 인식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역사 재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한국에 입국해 처음 받는 하나원 교육에서도 6·25전쟁이 누구에 의해 발발됐으며, 미군의 참전이 대한민국 국익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등에 대한 교육이 소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6·25전쟁 재인식 교육은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과 안보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북한이탈주민을 상대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북한이탈주민의 재북(北韓) 당시와 입남(南韓) 후 6·25전쟁 인식, 그리고 인식변화를 강화하기 위한 대안에 접근하고자 했다. 설문 대상자로는 대한민국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들 가운데 다양한 계층의 115명을 선택해 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 내용은 크게 북한이탈주민의 6·25전쟁에 대한 인식변화, 6·25전쟁에 개입한 미국에 대한 인식, 한반도에서 6·25전쟁 재발 가능성 등 3개 분야로 구성했다. 각론적으로는 조사대상자들이 재북 당시 인식했던 전쟁의 명칭과 성격, 전쟁발발의 원인은 무엇이며, 이러한 인식이 남한으로 입국 후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변했는지에 대한 과정을 조사했다. 본 논문은 북한이탈주민들의 인식변화 과정을 통해 북한정권으로부터 세뇌된 6·25전쟁 인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되는지에 대한 학문적인 단초를 제시하고자 했고, 나아가 한반도 통일과정, 즉 민족통합을 이루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시도하였다.
목차
1. 서론
2. 연구 설계
3. 연구결과
4. 결론 및 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