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내용 |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평양에 들어가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한 고려인이 몇 명인지 문건으로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나 외무성 국방성 등의 고문서를 보면 북한정권 창설 과정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물며 소련 공민인 고려인을 대거 동원하면서 소련 국방성은 당연히 그 근거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국방성 고문서는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채 역사의 뒤안길에 잠들어 있다. 박길용 전 북한 외무성 부상(모스크바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정치학 박사)과 강상호 전 북한 내무성 정치국장 겸 제1부상 등은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1945년 8월부터 1954년 초까지 북한에 파견된 고려인은 500여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15쪽)
그들은 모두 입북 전 소련군으로부터 ‘북조선에 들어가 붉은 군대의 건국사업을 도우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북한에 파견되기 이전에 전설의 ‘김일성 장군’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고, 김일성을 북조선의 지도자로 추대하라는 미션을 받은 것은 입북 시기에 따라 달랐다. 1945년 말까지 파견된 사람들은 북한에 파견된 이후 미션을 받았고, 1946년 이후 파견된 사람들은 파견 전 김일성 추대 미션을 받고 입북했다고 답변했다.(55쪽) “당시 소련 정부의 각 부처에서도 인민위원보다 부인민위원이 실무적인 권한을 쥐고 있었습니다. 소련은 이 시스템을 동유럽에 이어 북한에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소련 출신 고려인들이 각 부처의 부상을 장악하도록 한 것은 실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해서 각 파의 상을 견제하겠다는 ‘붉은 곰’의 발톱이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120쪽) 6·25전쟁이 북한의 계획적 남침이라는 사실은 이제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너무도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다. 그러면 6·25전쟁을 앞두고 북한은 사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했을까.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소련으로 귀환한 고려인들에 따르면, 평양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 휘하에 있는 소련 군사고문단이 6·25 남침 계획 초안을 작성했다. 이를 북한의 인민군 고위 장성들이 번역하고 수정했다. 이 과정에 소련 고려인 출신 고위 장성이 대거 참여했다. (141쪽) 1957년 모스크바에서 소집된 각국 공산당 및 노동당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평화와 전쟁 문제, 개인숭배 문제 때문에 국제공산주의권에서 이탈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 간에는 이론적·전략적 문제에서 분쟁이 생겼다. 분쟁은 날이 갈수록 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중국공산당과의 관계 변화는 북한의 피어린 사상검토 과정에서 김일성을 고무했고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그리하여 김일성은 반소친중(反蘇親中) 노선을 선택하고 사상검토를 맹렬히 벌였다. 사상검토는 전국 도처의 군부대, 직장, 촌, 당 및 정권기관 어디에서나 진행되었다. 사상검토에는 대중적 출당과 검거, 정치적 유배가 뒤따랐다.(215쪽) 평양의 카레이스키 엘리트들 스탈린이 급파한 고려인 500명의 슬픈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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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책머리에_연해주 이주 150주년, 평양에 간 고려인의 슬픈 이야기
제1장소련군정의 ‘손과 발’ 카레이스키 군단 제2장카레이스키 디아스포라의 슬픈 역사 제3장소련군정과 북한 주민의 가교 제4장소비에트화와 ‘김일성 정권’ 터 닦은 정치일꾼들 제5장소련파와 6·25전쟁 제6장소련파 ‘총수’ 허가이 죽음의 숨은 진실 제7장소련파 간부 ‘5인조 숙청사건’ 제8장소련파 숙청의 분수령 ‘8월 종파사건’ 제9장평양에 간 카레이스키 엘리트들의 슬픈 역사 제10장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부록1_북한에서 일한 카레이스키 엘리트 명단 부록2_소비에트 연표 부록3_북한사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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