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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과 불처벌의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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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버트 R. 킹
출판연도 2022년 11월 17일
출판사 한국과미국
쪽수 388쪽
키워드 #북한   #통일   #인권   # 정치   # 성경   # 인도   # 의도   # 지원   # 로버트 R.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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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소개 대체 이미지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미 국무부 북한인권 특별대사로 근무했다. 현재 국제전략연구소 선임고문, 한미경제연구소 비상근 연구위원, 북한인권위원회 이사로 일하고 있다. 킹 대사는 25년간 미 의회에서 일했으며(1983~2008) 톰 랜토스(Tom Lantos) 캘리포니아 하원의원 비서실장과 하원 외교위원회 실무국장(2001~2008)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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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내용
"한국어를 구사할 순 없어도 인권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로 자신을 소개하는 로버트 R 킹 북한인권특사는 실무자의 입장에서 마주한 “충격적(appalling)”인 북한인권의 실태를 드러내며 국제사회의 북한인권에 대한 의식 고양을 촉구한다. 
북한인권 문제는 북측 입장에서는 식량, 안보 및 기타 정치적 사안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북한인권특사로서 북한 고위 관료들과 인권에 대해 논의하며 마주하는 도전 과제는 만만치 않다. 북한의 인권 유린에 대한 국제사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외교적 역할을 한 주체인 미국을 대표하는 킹 특사는 이와 더불어 북한인권 개선과 정치적 자유 증진을 위한 국제적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 유엔, 유럽연합, 기타 국가 간은 물론 북한인권을 다루는 비정부기구들과의 협의와 토론, 북한인권 보호 향상을 위한 전략 검토, 유엔인권위원회 결의안 2004/13 이행을 지원하는 행동계획을 발전시키는 등 북한인권 문제 해소를 위해 개입한 경험을 나누며 통찰을 제공한다.
북한인권 탄압 및 침해는 북한 주민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가 저지르는 공개 처형, 고문, 강제 이전, 사상·표현·종교의 자유 침해, 차별, 성폭행, 강제 낙태 및 기타 성폭력, 노예화 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 일본 등 국적을 가진 외국인 납치 및 강제 실종 등 반인도적 범죄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조직적이고 광범위하며 심각한 인권침해가 지속될 수 있는 원인은 “정책, 제도, 불처벌 관행이 범죄의 핵심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라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결론 내렸다.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의 ‘지난 6년간 북한인권이 더 악화됐다.’는 평 가운데 9월 4일 북한인권법 시행 6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로버트 R. 킹 특별대사의 통찰은 시의적절하다. 정부와 민간 모두 북한인권 상황의 심각성을 제고하여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침묵을 깨고 북한의 끔찍한 인권 상황 개선에 기여하며, 더 나아가 북한이 국제사회의 건강한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

● 제1장 북한인권법
미 국무부의 ‘북한인권 특별대사’(이하 북한인권특사) 직책은 2004년 채택된 ‘북한인권법’에 근거하고 있다. 북한인권법은 미국 의회가 북한의 심각한 인권 유린에 관심을 기울이고 북한인권 증진을 추구하기 위한 첫 번째 주된 노력이었다. 당시 법안은 초당적인 지지를 받으며 논란 없이 채택됐다. ‘북한인권법’의 가장 중요한 조항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이 국무부 내에서 북한인권 특사를 임명한다”는 것이다. 북한인권특사는 유엔이 운영하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 제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제1대 북한인권특사는 변호사 출신의 제이 레프코위츠(Jay Lefkowitz)였다. 그는 관리예산처 자문, 대통령 국내정책 부보좌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당시 북한인권특사는 대사(ambassador)의 지위도 아니었고 상근직도 아니었기에 상원의 인준 없이 임명되었다. 그는 평소에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북한인권 관련 업무가 있을 때만 워싱턴DC로 날아와 일했다. 미 행정부가 북한인권 문제를 좀 더 비중 있게 다루기 위해서는 북한인권특사 직책의 변화가 필요했다. 
2008년 북한인권법이 재승인되면서 북한인권특사에 대한 조항이 강화되었다(참고: 미 의회는 법안이 정세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을 줄이기 위해 거의 모든 법안에 효력 만료일자를 명시하고, 법안이 지속될 필요가 있을 때는 심사를 거쳐 내용을 수정한 뒤 재승인한다). 재승인법은 북한인권특사가 국무부 내에서 적절한 위상과 입지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특사에게 ‘대사’의 권한을 부여하고 상근직으로 국무부 내에 사무실을 두게 했다. 
제2대 북한인권특사를 선정하는 과정은 매우 치밀했다. 북한인권에 대한 미 의회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킹(Robert R. King)은 1983년부터 2008년까지 톰 랜토스 미 하원의원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했으며 의회 근무 마지막 8년간은 미 하원 외교위원회 민주당 수석보좌관을 지냈다. 로버트 킹은 의회 업무를 잘 이해하고 의원 및 의회 직원들과도 친분이 두터웠기에 북한인권특사직에 적임자였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미국의 대외정책 우선순위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집중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 견제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대북정책을 담당하던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중국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대북 문제를 전담할 북한인권특사 임명이 시급했다. 이러한 정치적, 외교적 배경 하에 로버트 킹은 2009년 11월 제2대 북한인권특사에 임명됐다.

● 제2장 소방호스로 물을 들이키다(Drinking from a Fire Hose)
킹 대사가 북한인권특사에 취임하자마자 할 일이 쏟아졌다. 그는 당시 상황을 마치 “소방호스로 쏟아지는 물을 들이키는 것”(dring from a fire hose) 같았다고 회고한다. 킹 대사가 취임한 2009년은 북한이 2006년에 이어 두 번째 핵실험을 단행해 북미갈등이 첨예하게 고조된 시기였다. 킹 대사는 취임 직후인 2009년 12월 유엔인권이사회가 개최하는 북한의 제1차 보편적 정례인권검토(UPR)에 참석해 미국의 입장을 밝혔다. UPR은 유엔 회원국이 자국의 인권상황을 스스로 평가해 유엔에 보고하고 이를 회원국들에게 검토받는 절차다. 
북한이 UPR에서 제시한 자국의 인권상황을 살펴보면 인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는 거리가 먼 주장이 가득했다. 특히 북한은 미국의 북한인권법을 “인권 보호와 증진의 장애물”로 규정하며 맹비난했다. 북한은 미국이 ‘인권보호’라는 구실 아래 북한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으며 ‘북한인권법’이 그 전형적 사례라고 강조했다. 킹 대사는 미국을 대표해 북한에서 자행되는 초법적 처형, 고문, 강제노동, 성폭력 문제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북한을 비난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인권증진 노력을 장려하기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인권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강조했다. 
킹 대사는 취임 직후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들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2009년 12월에는 로버트 박이, 2010년 1월에는 아이잘론 마흘리 곰즈가 불법 월경 혐의로 북에 체포되었다. 사실 미국인의 북한 억류는 북한인권 증진을 위한 미국 정부와 대북 민간단체들의 활동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 중 하나다. 과거 미국인의 북한여행이 허용되던 시절에는 미국인이 북한에 억류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2009년 은아 리, 로라 링 등 두 명의 미국 기자가 불법월경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들의 석방을 위해 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으로 직접 날아가 김정일을 만나야 했다. 이 두 미국인의 억류와 석방은 전 세계 이목을 북한에 집중시켰다. 킹 대사는 이 사건이 향후 북한에 억류되는 미국인의 숫자가 증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보았다. 북한은 미국인 억류를 미국 정부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자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주권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킹 대사는 유엔 및 유럽연합과도 긴밀히 협력했다. 그는 2010년 3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 참석해 비팃 문타폰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과 면담했다.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2004년 유엔인권위원회(유엔인권이사회의 전신)가 채택한 북한인권결의에 근거해 마련된 제도다. 킹 대사는 또한 유럽연합 및 일본 대표단과 만나 북한인권 결의안 초안 작성을 논의하고, 여러 국가 대표들과 만나 결의안 투표에 찬성해 줄 것을 독려했다. 2010년 4월에는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유럽연합 및 유럽의회 관계자들과 만나 북한인권을 둘러싼 미국과 유럽연합의 협력을 다졌다.
2010년 11월 23일에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4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이 한국의 민간인 거주지역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연평도 포격을 “한국전쟁 이후 가장 위중한 사건 중 하나”로 규정했다. 북한이 왜 그 시점에 도발했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식량원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북한이 2009년 제2차 핵실험을 감행하면서 한국 정부의 지원이 전면 중단된 데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까지 가동됐다. 더구나 북한은 2009년 말 화폐개혁으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았다. 군사 도발의 또 다른 이유는 김정일의 건강에 대한 우려와 권력승계 때문이었다. 2009년 1월 김정일의 막내아들 김정은이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음이 노동당 고위 간부들에게 통보되었다. 이후 본격화된 권력 승계작업은 연평도 포격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 제3장 2011~2012 인도적 식량지원 협상
한국의 진보정권은 북한에 상당한 규모의 인도적 식량지원을 제공했지만 북한의 2009년 핵실험으로 모든 지원이 중단되었다. 2009년 북한은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사실상 식량 공급의 새로운 원천으로 떠오른 시장에 엄청난 교란을 가져왔다. 더구나 2010년 가을 북한은 심각한 수해를 입어 식량위기가 가중되었다. 당시 유엔세계식량계획(WFP)과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54만 2,000톤의 곡물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2011년 1월 북한은 유엔주재 북한대표부를 통해 미국에 식량지원을 요청해왔다. 대북 식량지원에서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식량이 시장에 판매되거나 다른 목적으로 전용되는 것이었다. 미국은 식량이 가장 필요한 취약계층에게 전달되길 바랐으나 북한은 식량 배분 과정에 개입하고자 했다. 북한의 상위계층을 먼저 챙겨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 북한은 식량 배분 모니터링 요원을 일방적으로 줄여버리거나, 식량이 북한 항만에 하적되자마자 일방적으로 프로그램 중단을 선언하고 모니터링 없이 식량을 나눠준 전력이 있었다. 
킹 대사와 협상단은 2011년 5월 평양으로 날아가 북한 협상단과 식량지원 조건을 논의했다. 특히 미국의 인도적 지원을 받으려면 모니터링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같은 해 10월 2차 협상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미국은 24만 톤의 식량 제공을 제안했는데, 이전에 비하면 적은 양이라 북한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더구나 미국은 쌀이 아닌 어린이용 고단백 비스킷, 비타민 함유 식품 등 시장성이 떨어지는 식량을 제공하기로 했다. 쌀은 현금화되기 좋은 물품이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 없는 북한 주민들에게 이전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의 대북 식량지원은 인도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 정치적 사건과 연계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에디 용수 전(Eddie Yongsu Jun, 이하 전용수)의 석방이었다. 평양에서 북미 간에 대북 식량지원 논의가 한창이던 당시 한국계 미국인 전용수가 북한 당국에 체포돼 있었다. 킹 대사는 전용수를 면담하고 북측에 석방을 요청했지만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과 같은 정치적 거물의 개입 없이 전용수가 석방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석방 요청을 받아들였다.
두 번째는 6자 회담 재개 논의였다. 당시 스티브 보스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성 김 부대표는 북한과의 6자 회담 재개를 위한 북측과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북한은 비핵화 협상에 나서는 조건으로 인도적 지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보스워스 대표는 “북측이 식량원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식량원조는 미국이 얼마나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명백한 잣대로 간주되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사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북한이 인도적 사안을 정치적 사안과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원칙적으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목적과 무관하게 제공돼야 하지만 북한은 억류된 미국인을 석방하고 비핵화 논의에 참여하는 대가로 인도적 지원에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려 노력했다. 미국 국내법은 인도적 지원이 필요(needs)에 근거해 제공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기에 킹 대사는 대북 식량지원을 정치적 사안과 분리하려 노력했지만 북한이 이 둘을 계속해서 엮으려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대북 식량지원 논의가 한창이던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비핵화는 물론 인도적 지원에 이르기까지 북한과의 협상 노력은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된다. 새로운 지도자는 당, 군, 정 관료에 대한 자신만의 통제를 확립해야 했다. 그가 설령 아버지의 대내외 정책을 그대로 추구하더라도 김정은에게 당장 필요한 자신이 정책 책임자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으며 핵무기 협상이나 식량자원 확보는 나중 문제였다.
2012년 2월 북한은 우라늄 농축 및 미사일 실험 중단에 합의하고 IAEA 사찰단의 영변 핵시설 재조사 허용을 발표했다(이를 “윤일협정”이라 부른다). 6자 회담도 재개될 예정이었다. 비핵화 협상이 타결되면서 북측은 인도적 지원 과정에서 모니터링을 대폭 축소하는 쪽으로 협상을 이끌려 했다. 양측은 여러 논의 끝에 식량 지원 제공 및 지원 분배 모니터링 조건에 합의했다. 미국은 매달 2만 톤씩 총 12개월 동안 24만 톤의 식량을 지원하고 북한은 모니터링 요원 증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북한은 2012년 3월 16일, 김일성 탄생 100주기를 기념해 탄도 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위성을 쏘아올렸고 이는 명백한 윤일협정 위반이었다. 식량지원 제공은 이제 정치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미국 일각에서는 인도적 지원과 비핵화 논의를 연결짓는 것을 규탄하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북한이 식량원조 문제를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와 분리시키지 않으려 했다. 북한은 식량지원 제공을 오로지 정치적 이유로 내려진 결정으로 간주했다. 만약 북한의 도발 여부와 관계없이 지원을 받는다면 대중들은 인도적 지원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이며 지원자금을 의회로부터 승인받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 제4장 북한인권과 유엔의 역할
북한인권 증진을 위한 미국의 노력에는 유엔과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적대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유엔과 협력할 경우 북한인권 증진에 대한 미국 정부의 노력을 국제적 차원의 것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북한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유엔 기구는 유엔인권이사회다. 킹 대사가 북한인권특사로 재직하던 오바마 행정부 8년(2009~2017) 동안 미국은 유엔인권이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회원국이었다. 유엔이 북한을 압박하는 데 미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다른 많은 국가들도 유엔의 북한인권 증진 노력에 동참했다. 대표적인 것이 북한인권결의다. 유엔인권이사회는 2003년부터, 유엔총회는 2005년부터 북한인권결의를 채택해왔다. 
유엔의 인권메커니즘의 대표적인 제도 중 하나는 보편적 정례검토(UPR)다. UPR은 193개 모든 유엔 회원국이 참여하며 5년 주기로 반복된다. 각 나라가 자국의 인권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회원국들이 이를 열람한 뒤 본회의에서 논의하고 권고안을 제시한다. 해당 국가는 3개월 후 이에 응답해야 한다. 북한은 2009년 제1차 UPR 당시 회원국들이 제시한 167개 권고사항 중 단 하나도 수용하지 않았다. UPR 대상 국가가 권고사항을 단 한 건도 수락하지 않은 것은 북한이 처음이었다. 
반면 2014년 제2차 UPR에서 북한의 태도는 이전과 달라졌다. 당시는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가 발표된 직후라 북한은 유엔의 인권규범을 잘 준수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애썼다. 북한은 제1차 및 제2차 UPR의 권고사항을 다수 수용했다. 그러나 북한이 수용한 권고들은 주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및 여성과 아동의 권리 등 정치적으로 예민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전문가들은 “약한 권고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수용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 변화는 거부하며 수용된 권고를 제한적으로 이행하여 최소한의 비용으로 인권을 준수했다고 주장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북한인권 증진에 가장 결정적 계기가 마련된 사건은 유엔의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설립이다.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설립을 위해서는 여러 설득이 필요했다. 인권문제로 북한을 지나치게 압박하면 비핵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것이라는 일부 회원국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인권 침해가 널리 알려지고 비핵화에 아무런 진전이 없자 국제사회의 여론이 돌아섰다. 북한인권조사위원회는 서울, 도쿄, 런던, 워싱턴DC에서 공개 청문회를 열어 약 80명의 탈북민읜 증언을 청취했다. 또한 신분 노출을 꺼리는 탈북민과 약 240건의 비밀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북한을 상당히 압박하는 결과는 낳았다. 보고서 발표 이후 당시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었던 마르주키 다루스만은 북한 관료들로부터 면담을 요청받았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과 협의하려는 다루스만의 모든 노력을 거부당했다. 북한 관료들은 다루스만에게 2014년 유엔총회 북한인권 결의안에서 ‘북한 지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겠다’는 내용을 삭제해주면 방북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루스만은 결의안 내용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2014년 유엔총회 북한인권결의는 “조사위원회 결론과 권고를 고려해 책임성 규명 보장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장려한다”고 언급했다. 여기에서 “조치”는 북한의 ICC 회부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북한이 조사위원회 설립과 결과보고서에 대해 맹렬히 반발한 것은 북한인권에 대한 유엔의 압박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는 하나의 증거다. 북한은 조사위원회 설립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정치협잡행위”라고 비난했으며 조사위원회 보고서 전문이 공개되자 “미국의 명령에 따라 날조된 거짓말”이라고 반발했다. 또한 조사위원회 마이클 커비 위원장에 대해 “늙다리 호색광”이라 칭하며 인신공격을 감행했으며 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한 탈북민을 “인간쓰레기”라고 비판함으로써 조사위원회 보고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자 했다. 2014년 9월에는 ‘조선인권연구협회 보고서’를 발표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비난하고 북한인권 상황을 방어했다. 그해 10월에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정치화하려는 일부 세력들의 공격적 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북한인권 대체 결의안을 마련하고 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여러 인권 분야 가운데 북한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는 인권 분야에서는 피상적이나마 다소간의 개선을 보였다는 점이다. 우선 북한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아동권리협약 선택의정서, 국제대테러협약에 서명했다. 또한 2014 제2차 UPR에서 268개 권고 중 185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5년 전 제1차 UPR에서 단 한 건도 권고를 수용하지 않은 것에 비하면 눈에 띄는 변화였다. 또한 2017년 5월 유엔 장애인인권특별보고관의 방북을 허용했다. 특별보고관의 방북이 허가된 최초의 사례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북한 정권이 유엔의 압력을 받아 인권문제와 관련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북한인권조사위원회의 업적은 이러한 진전을 가져온 주요한 촉매제였다. 북한에 대한 인권 압박이 비핵화 노력을 복잡하게 만들고 방해하기까지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국제협약에 서명 및 비준함으로써 수용한 국제 인권 기준과 의무를 따르도록 압박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국제 표준 모니터링을 수용하라고 설득하는 노력이 무색해질 것이다. 국제 인권 기준의 준수는 북한 체제가 국제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의 일부이며 인권은 안보와 분리될 수 없다. 

● 제5장 자유로운 정보유입
북한은 언론탄압이 가장 심각한 국가 중 하나다. 2020년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세계언론지수’에 따르면 북한은 180개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미국의 북한인권법은 정보 정책 및 프로그램, 특히 라디오 방송의 자유가 북한인권을 개선하고 민주적 변화를 장려하는 데 중요하다고 봤다. 북한인권법은 “북한 외부로부터 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라디오 기기를 북한에 공급할 수 있도록 재정을 확대하여 “북한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정보가 북한 내부에서 유통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청했다. 
북한 정부는 정보 접근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정권 장악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외국 미디어 청취가 외부 세계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언론에 대한 통제는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최고지도자를 찬양하는 기사만을 접하게 한다. BBC 기자가 입수한 북한의 보도지침(‘기자활동상식’)에 따르면 “신문이 수령을 변함없이 존경하고 위대한 혁명 지도라도 칭송하는 기사를 싣는 것은 바람직하다”.
김정은 정권은 외부 미디어 청취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2012년경 북한의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사용되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 ‘서명 시스템’을 도입해 북한 네트워크에 연결된 휴대전화, 태블릿, 컴퓨터에서 승인되지 않은 모든 파일 및 프로그램을 자동으로 식별하고 삭제하게 했다. 북한 주민들은 아예 인터넷 접속을 할 수 없으며 정보량이 훨씬 적은 인트라넷에 접속할 수 있는데, 인트라넷에서는 북한 정권의 이념과 일치하는 자료만 사용할 수 있다.
북한주민들은 주로 DVD나 USB 드라이브를 통해 외부 콘텐츠를 시청한다. 북한은 외부 콘텐츠를 적발하는 ‘109그루빠’를 운영해 예고 없이 가택수색을 실시하며 디지털 기기를 단속한다. 한 탈북민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3가 ‘109그루빠’로부터 단속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북한 정권이 외부정보 통제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 북한에서는 음란물 유포가 늘어나고 있고 북한은 이를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 북한은 성적 부도덕을 “썩어빠진 자본주의 영향”의 결과로 간주한다. 한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USB 공(空)드라이브 가격은 5달러, 영화 또는 드라마가 담겨 있으면 10달러, 최신 영화 또는 드라마는 20달러, 음란물은 100달러부터 가격이 시작돼 음란성이 높으면 최대 500달러까지 거래된다. 북한에서 음란물의 처벌은 정치 뉴스나 오락물 소지보다 더 가혹하다.
북한에서 외국 라디오 청취는 금지되지만 여전히 라디오는 북한 주민이 외부 방송을 접하는 주된 매체다. 북한에서 가장 많이 듣는 대북 방송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자유아시아방송과 미국의 소리, 그리고 KBS의 한민족방송이다. 이외에도 탈북민이 주도하는 NGO들도 여러 지원을 받아 라디오 방송을 운영한다. 북한 주민이 외국 라디오를 가장 많이 듣는 시간대는 단속반이 들이닥칠 가능성이 적은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다. 이를 고려해 대북 방송은 주로 밤 시간에만 방송을 송출한다. 북한은 전파 방해를 통해 외국방송의 수신을 막으려 하지만 전파 방해는 상당한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에너지난에 시달리는 북한으로서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라디오는 북한에 외부정보를 전달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수단이다.
북한은 최근 휴대전화 사용이 급격히 증가했다. 2020년 기준 북한의 휴대전화 수는 600만 대로 추산되며 인구의 거의 20%가 휴대전화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휴대전화 시스템이 강력한 통제 아래 운영되도록 했다. 우선 북한의 휴대전화는 국제전화가 안 되고 국내전화도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대전화의 보급은 북한 주민들의 연결성을 높였다. 주민들은 중국 휴대전화를 구입해 북중 접경지역에서 중국이나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또한 국경무역을 하는 북한주민들은 업무용으로 중국 휴대전화를 사용한다. 국경수비대가 이를 단속하지만 적절한 뇌물을 주면 피할 수 있다. 
북한의 휴대전화 보급이 가져온 한 가지 의외의 현상은 휴대전화가 소유자의 명성, 지위, 부를 보여주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북한주민들이 북한 네트워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애플이나 삼성의 스마트폰을 구입한다. 특히 북한 장마당의 여성 기업가들 사이에서 애플 아이폰과 삼성 스마트폰 수요가 높다. 김정은과 그의 아버지 김정일도 애플 제품의 열렬한 팬이었다. 김정은은 중국에 아이패드2가 출시되자마자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대한 외부정보 전달에 가장 논란이 되었던 사건은 풍선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남한의 인권단체들은 전단, USB드라이브, 현금을 실은 헬륨 풍선을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주기적으로 쏘아 올리고 있다. 북한은 이에 대해 극렬히 비난했다. 2020년 6월 김여정은 풍선을 쏘아 올린 탈북민들에게 “조국을 배반한 들짐승보다 못한 인간 추물”이라고 비난하며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폭력도 불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북한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함으로써 김여정의 위협이 사실이었음을 강조했다. 
풍선을 이용한 정보전달이 과연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풍선은 일반적으로 국경에서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국경 인근에 떨어진다. 여러 탈북민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풍선을 통해 외부 정보를 습득한 경우는 드물었다. 1950년대 냉전 유럽에서도 풍선 투하 방식으로 전단을 살포했지만 5년 만에 중지했다. 메시지 전달에는 풍선보다 라디오가 더 효과적이었으며 풍선은 항공교통에도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풍선을 통한 전단지 투하가 정보전달의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점은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북단체가 계속해서 풍선을 쏘아 올리는 것은 아마도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함일 것이다.

● 제6장 북한의 미국인 억류
킹 대사가 북한인권특사로 일하며 가장 다루기 힘들었던 문제는 미국인의 북한 억류였다. 북미 간에는 외교 관계가 체결돼 있지 않아 스웨덴과 ‘보호권’ 협정을 맺고 북한 내 미국인의 영사업무를 스웨덴 정부가 대행하지만, 미국인이 북한에서 체포되거나 구금된 경우 제공할 수 있는 지원은 대단히 한정적이다. 
북한이 미국 시민을 억류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북한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는 자국의 법률을 위반한 방문객을 체포하고 구금한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행위가 북한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령, 나이트클럽 화장실에 성경책을 두고 나온다든가, 기독교 전파와 관련된 내용을 노트북에 담아 왔다는 이유로 실제 미국인이 구금된 경우가 있다. 두 번째,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적대정책을 펴고 북한을 붕괴시키려 한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미국에 대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북한은 미국 시민을 구금한 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유력인사를 방북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국가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믿는다. 네 번째, 북한은 미국인 억류를 통해 미국 정부 또는 억류자 가족들로부터 현금이나 기타 사안에 양보를 얻어내려 한다. 가장 최근 사례로는 오토 웜비어 송환을 위해 조셉 윤 미국정책 특별대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200만 달러의 의료비 청구서를 내밀었다. 
1999년 이전까지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은 3명에 불과했고 1999년부터 2009년 이전까지 10년 동안은 어떤 미국인도 북한에 억류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무려 16명의 미국인이 북한에 억류되었다. 2009년 은아 리와 로라 링이 북한에 체포되면서 북한 당국이 미국인 억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북한은 이 사건이 국제적 관심을 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깨달았다. 북한은 사건 초기부터 두 사람의 석방을 위해 미국의 고위 관료가 방북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석방이 이뤄졌다.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오토 웜비어다. 그는 2016년 버지니아 대학교 3학년 재학 중 북한 단체관광을 떠났다가 숙소 복도에 걸린 선전물을 떼어낸 혐의로 체포됐다. 구금 2개월 만에 웜비어에 대한 재판이 열렸고 그는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상한 것은, 통상적으로 스웨덴 외교관에게 허용되던 접견이 웜비어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웜비어가 재판 직후 건강에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2017년 5월 미국에 송환된 웜비어를 진찰한 미국 의료진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첫째로는 웜비어가 뼈가 부러지는 등의 학대를 당한 흔적이 없다는 점, 둘째로는 웜비어가 혼수상태에 빠졌음에도 14개월이나 살아남았다는 것은 북한에서 전례 없는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았다는 점이다. 북한이 웜비어를 심리적으로 압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신체적 학대를 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사례를 보더라도 북한은 미국인 억류자를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왔다. 
오토 웜비어의 사망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죽음을 북한인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수단으로 이용하며 안보문제를 두고 북한을 압박했으며 2018년 첫 국정연설에는 웜비어의 부모를 초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회담 개최가 결정되자 백악관의 모든 언급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비판 내용이 사라졌다. 북한인권을 일종의 거래 용도로 사용한 트럼프의 전략은 비핵화 및 안보문제에 북한의 협력을 유도할 목적으로만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했음을 시사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2018년 5월 북한에 억류되었던 김동철, 김상덕, 김학송 등 세 명의 한국계 미국인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인 억류자를 다루는 방식은 오바마 행정부와 매우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과 펜스 부통령,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앤드루스 합동기지에서 직접 이들의 귀환을 맞이했다. 수많은 기자 앞에서 이들을 소개했으며, 사진과 영상이 잘 나오도록 배경에는 밝게 빛나는 거대한 미국 국기도 마련했다. 놀라운 것은 정작 이들의 가족은 귀환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가족의 상봉을 기뻐하는 사진과 영상이 찍히면 대통령이 중심이 되는 장면을 만들 수 없다는 우려가 있었던 모양이다. 
미국인 억류자 송환을 대통령에 초점을 맞춘 대대적인 언론행사로 기획한 것은 향후 북한이 미국이 억류자 석방에 더 큰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을 높이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의 위신과 지도력이 위태롭다고 판단할 경우 김정은은 더 큰 요구를 해도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인 억류자 석방이 향후 악용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관심도를 낮추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었다.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의 사례를 돌아보며 유념해야 할 것은 미국인 석방을 위해 고위 정치인이 방북하는 관행이 오히려 대북관계에 어려움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미국인 석방을 위해 전현직 미국 지도자가 방북하는 것은 김정은 정권에 ‘적대적인 미국인들조차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이미지를 강화시킬 뿐이며, 북한 정부가 통제하는 언론은 이를 이용해 북한 주민들에게 정권의 막강한 권력을 인위적으로 부풀려서 보여준다. 

● 제7장 탈북민: 북한 탈출과 재정착
북한에서는 이동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으며 극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출국 허가를 받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탈북이 급증해 약 35,000명의 북한 주민이 탈북에 성공했다. 탈북경로는 과거 중국 동북부와 몽골을 경유하던 것에서 최근에는 중국 서남부와 동남아를 경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김정은은 탈북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국경수비대를 증가시키는 등 탈북을 막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심지어는 국경수비대에게 불법 월경자에 대한 총살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 결과 김정은 집권 이후 탈북민의 숫자는 감소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강력한 처벌 이외에도 공격적인 언론 선전을 통해 탈북을 막으려 노력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탈북민의 ‘재입북’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으로 탈출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온 한 여성은 TV에 출연해 “조국을 배반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김정은이 자신을 “깊은 사랑의 보살핌”으로 인도한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선전은 탈북민이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을 강조하면서 탈북민을 돕는 인권 운동가를 “착취적인 사람들”로 묘사한다.
탈북민에 대한 중국의 정책 역시 탈북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중국은 중국을 경유하는 탈북민을 붙잡아 북한에 송환해 왔다. 중국 정부는 탈북민이 처한 북한에서의 열악한 삶에 대한 연민도, 탈북에 실패한 주민들이 북한에 송환돼 겪게 될 징벌적 처우에 대한 걱정도 전혀 하지 않는다. 탈북민은 중국을 단지 경유할 뿐 최종 목적지로 삼고 있지 않은데도 중국 정부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은 북한을 탈출해 한국 등 다른 지역에 재정착하려는 탈북민들이 중국을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촉구해 왔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 주민은 정치적 난민이 아니라 경제적 이주민”이라는 상투적인 답변을 반복할 뿐이었다. 
특히 중국은 탈북 여성의 인신매매를 묵인 또는 방조하고 있다. 탈북 여성이 중국에 도착하면 인신매매범들은 이들을 유인하거나 협박해 성매매를 시키거나 또는 시골의 중국 농부와 강제로 결혼하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더 복잡한 문제는 강제결혼 또는 성매매의 결과, 탈북 여성과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다. 어머니는 불법체류자라 북한에 송환될 위험이 크고, 그렇게 되면 자녀와 아버지만 중국에 남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또한 탈북 여성이 가까스로 탈출하더라도 많은 경우 아이를 중국에 두고 올 수 밖에 없다. 2020년 미 국무부 인신매매보고서는 중국과 북한을 모두 최하위인 3등급 국가로 지정했다. 이는 양국 정부가 인신매매 방지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도 통과하지 못했으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보고서는 북한 여성의 인신매매에 일조하는 중국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탈북민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한 화해 노력이 아이러니하게도 탈북민 지원 정책의 축소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달라졌다. 문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에는 저명한 인권변호사였으나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북한의 인권유린을 경시했다. 전문가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 “김정은과의 교류가 단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이 된 이후로 침묵을 지켰다”고 분석했다.
2019년 11월 탈북민과 관련된 두 건의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 사건은 한국 정부가 16명의 선원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두 명의 탈북민을 북한으로 추방한 것이다. 이들을 송환하기로 한 문재인 정부의 결정은 이들의 변호인 접근도, 사건에 대한 법원 심리도, 정부의 송환 결정에 대한 항소도 허용되지 않은 채 이뤄졌다. 북한에서 범죄를 저질렀거나 탈북 의도가 부정직하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탈북민을 북송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11명의 탈북민이 베트남에서 체포된 일이었다. 이들은 북한에 송환될 예정이었는데 문재인 정부가 이들이 한국으로 올 수 있도록 충분한 외교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일었다. 당시 외신은 이 사건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인권을 등한시한다” “한국은 탈북민 석방에 관여를 원치 않는다”는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이 사건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불거지자 한국 정부는 뒤늦게 이 문제에 개입해 탈북민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했다.
또 다른 분명한 정책 변화는 2019년 11월 유엔총회에서 한국 정부가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2020년 11월에도 공동제안국에서 빠지자 국제 인권단체들은 한국 정부는 비판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 부대표로 6년간이나 근무한 이력을 고려하면 이러한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

● 제8장 대북 인도적 지원
미국 정부와 NGO는 전 세계적으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오랫동안 협력해 왔지만, 북한은 특수한 사례이다 보니 협력이 더욱 중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협력이 더 어렵기도 하다. 2011~2012년 미국의 대북 인도적 식량지원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로 무산되었지만 이후 미국은 몇 차례 북한의 긴급한 인도적 지원 요청에 따라 여러 NGO 및 국제기구를 통해 의약품, 비상식량 등을 제공해왔다. 2010년에는 60만 달러, 2011년에는 90만 달러, 2016년 말과 2017년초에는 100만 달러에 달하는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특히 2017년 당시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강력히 규탄하고 있었지만 유니세프를 통해 100만 달러를 지원함으로써 인도적 지원이 정치적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엔안보리의 대북 경제제재 및 미국의 독자제재는 북한에서의 NGO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대북제재가 발효되면 연료, 사치품, 선박, 차량, 금속, 광물 등의 북한 내 반입이 금지되며 북한과의 금융거래 및 활동이 제한된다. 특히 NGO들은 북한 활동 관련 비용을 지불하려면 북한에 송금이 가능해야 하는데 금융거래에 대한 대북제재는 NGO 활동에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물론 미국의 대북제재는 북한의 인도적 활동에 대해서는 예외를 허용하고 있지만 예외를 승인받는 과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상당한 법적 비용이 소요된다. 트럼프 행정부 초기에는 인도적 제재 면제 승인을 의도적으로 느리게 진행하기도 했다.
북한 내 NGO 활동에 또 하나의 걸림돌은 미국인의 북한여행 금지령이다. 미 국무부는 여행 주의보 및 경고를 발행해 미국인에게 여행에 따르는 위험을 조언하지만, 이는 권고사항으로 법적 금지조치는 아니다. 2009년 이후 북한의 미국인 억류가 본격화되면서 국무부의 여행경고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심지어는 북한으로 여행할 때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고 적절한 보험 수혜자 또는 위임자를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급기야 2017년 7월 국무부는 미국 여권으로 북한을 여행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는 단순히 미국인의 방북을 막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낳았다. 2011년 이후 북한을 한 번이라도 여행한 적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무비자로 미국에 입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인의 북한 여행금지령은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압박’(maximum pressure)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북한여행 금지령은 미국 인도주의 단체의 지원을 급격히 줄어들게 만들었다. 유엔과 민간 구호단체들은 사실상 대북 인도적 지원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강력한 인도적 사유’가 존재할 경우 여행금지를 면제해 주지만 문제는 미국 정부가 그 사유에 대해 매우 좁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미국 정부가 여행금지 면제 요청 처리를 의식적으로 지연시키려는 경향도 있었다. 자선 기부로 자금을 조달하는 비영리 NGO로서는 면제승인 과정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활동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대북 인도적 지원 외에도 북미가 연계된 인도적 사안으로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등록부를 관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산가족 상봉을 원하는 남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한국계 미국인은 이산가족등록이 허용되지 않는다. 북에 가족을 둔 한국계 미국인은 대략 1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설령 한국계 미국인이 북에 있는 가족을 찾더라도 상봉 가능성은 매우 적다. 북한은 미국을 오랫동안 주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북한 주민이 미국에 친척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당하거나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미국 전쟁포로(POW)와 전쟁실종자(MIA)의 유해 발굴 및 송환은 미국 정부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인도적 사안이다. 미 국방부 전쟁실종자 전담부서에 따르면 7,800명 이상의 유해가 여전히 실종 상태이며 그 중 5,300명의 유해는 북한에 있다. 북한은 유해 반환을 오직 북미관계 개선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북미간 대북 식량지원 협상과 비핵화 협상이 한창이던 2011년 북한은 주한 미군 유해발굴 작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윤일협정이 결렬되고 미국의 인도적 지원 협상이 실패하자 작업을 전면 중단했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당시에는 회담이 끝난 뒤 6주 만에 북한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유해가 담긴 55개의 상자를 미군에 인계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였으며, 정상회담의 몇 안 되는 긍정적인 성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인도적 노력이 지도부의 정치적 의제 추진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유용하다고 인식한다. 인도주의적 관심은 둘째 문제다. 북한은 미군 유해 수습을 “일종의 미끼”로 사용했다.

● 제9장 돌아온 북한인권법 
북한인권법은 2004년에 처음 만들어져 2008년, 2012년, 2017년 재승인 법안이 채택되었다.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북한인권법은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에 의회가 광범위한 합의를 모아주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게다가 재승인 법안은 상원, 하원에서 논의될 때마다 이념과 진영을 뛰어넘어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 갈수록 양극화돼 가는 의회 양원에서 양당의원이 특정 사안에 전폭적 합의를 이뤘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4년 동안 북한인권특사를 임명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미관계에 있어 인권을 부차적 문제로 취급했다. 북한이 인권문제를 불편해했기 때문에 인권문제를 아예 제기하지 않아야 북한이 핵무기 제한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미관계에서 인권이 고려되는 경우는 다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섭 수단으로 간주될 때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1월 첫 국정연설에 북한인권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오토 웜비어의 부모와 한국에서 온 탈북민을 초청하고, 연설 내용의 상당부분을 북한인권 문제에 할애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끝난 이후로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는 달라졌다. 2019년 1월 국정연설에서는 북한인권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같은 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인권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마땅히 북한인권을 비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트럼프 행정부는 침묵했다. 2020년 미 국무부가 매년 발행하는 국가별 인권보고서 주요 연설자로 나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중국, 코바, 이란, 베네수엘라의 인권침해를 강조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인권 증진을 위한 유엔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 태도를 보였다. 2018년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탈퇴했으며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유엔 안보리에서 열린 북한인권 공개 논의도 2018년부터는 미국의 비협조로 열리지 못했다. 북한 인권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표변한 까닭은 트럼프 행정부가 북미 간 생산적 교류의 가능성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권은 미국의 대북정책의 한 단면일 뿐이며, 인권이 외교를 흔드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인권증진은 안보 개선에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다. 자국민을 억압하는 국가는 다른 국가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국민의 복지와 안녕보다 핵무기 확보를 우선하는 정권은 그 핵무기를 남에게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북한주민의 인권 문제는 결국 체제 내부의 압박을 증가시켜 자원배분의 우선순위를 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정권의 우선순위가 국민의 안녕과 행복으로 옮겨간다면 한반도의 안정은 물론 안보문제에 있어서도 진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세내역
목차
추천사
감사의 글
제1장 북한인권법
제2장 소방호스로 물을 들이키다
제3장 2011~2012년 인도적 식량지원 협상
제4장 북한인권과 유엔의 역할
제5장 자유로운 정보의 유입
제6장 북한의 미국인 억류
제7장 탈북민:북한 탈출과 재정착
제8장 대북 인도적 지원
제9장 돌아온 북한인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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