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한하운과『한하운시초』
한하운과 그의 첫 시집『한하운시초』(1949)는 본격적 비평의 대상이 되어오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문둥이시인이라는 데 말미암거니와, 더구나 그를 발굴한 이병철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월북했다.『한하운시초』초판(1949)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한하운은 이병철의 부재로 전후 남한의 시적 고아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 시집을 낸 정음사는초판의 좌익적 체취를 걷어낸 재판(1953)을 출판함으로써 한하운을 구하려고 시도했지만, 전후 남한의 경직된 반공분위기 속에서 한하운은 졸지에 좌익으로 공격받고, 시집 또한 좌경으로 매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화를 거쳐 오히려 한하운이 남한사회에 연착륙하게되면서, 시인 한하운은 사라지는 역설이 실현된다. 제2시집『보리피리』(1955)는 그 단적인표현이다. 이 힘겨운 생존과정...
[학술논문] ‘한하운 시집 사건’(1953)의 의미와 이병철
1953년 6월 30일 『한하운(韓何雲詩抄)』 재판이 출간되자, 「민족적 미움을 주자―적기가(赤旗歌) 『한하운시초』와 그 배후자」(이정선)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시집 『한하운시초』가 공산주의 선전 선동의 기제이고, 작가 한하운은 아바타에 불과하고 이병철이 배후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기사가 여론을 증폭시켜 치안국, 검찰청, 국회까지 개입하게 되고, 이 사건은 휴전 직후 남한 문학장에 반공 냉전 프레임을 조성하고 문단이 재편성되는 사태를 초래했다. 본고는 『한하운시초』 초판(1949년 5월 발행)을 편집하고 발행을 주선한 시인 이병철을 중심에 놓고 ‘한하운 시집 사건’을 추적해 보았다. 해방기 전위시인 이병철은, 1948년 8월 남한단독정부 수립과 그해 12월 국가보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