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1945~1946년 조선공산당의 선전 활동: 『해방일보』를 중심으로
...『해방일보』는 조공의 통일전선 전략을 반영해 한민당을 ‘반동’으로 규정하면서도 이승만·김구 등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며 이들과의 제휴 가능성을 모색했다. 1945년 말 신탁통치 파동을 계기로 『해방일보』를 통한 조선공산당의 선전 활동은 전면 수정되었다. 1946년 초부터 『해방일보』는 식량난과 테러 문제를 집중 보도하며 우익에 대한 비판을 강화했고, 이는 당시 남한 사회의 주요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특히 경찰의 편파성과 우익 청년단체의 폭력을 고발하는 기사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1946년 3월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이 전해지자, 조공은 이를 활용해 남북한 정책을 비교하며 미군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전략을 취했다. 미군정은 『해방일보』의...
[학술논문] 한국전쟁과 문화(인)의 배치 - ‘적치 90일’의 선전선동사업과 문화공작대 활동
이 논문은 북한의 남한 지역 점령통치 기간에 실시된 선전선동사업에 주목하여, 특히 문화(인)의 동원양상을 『해방일보』를 통해 살펴보았다. 소위 ‘적치 90일’로 알려진 이 기간을 전쟁의 의미화가 진행되는 과정으로 보고, 점령기 미디어와 문화․문학 활동에 나타난 특징을 논의한 것이다.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선전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방위적이고 총력적인 선전활동을 실시했다. 북한은 전전 5년간의 문화사업을 바탕으로 선전원-문화선전실-서클사업의 연계 체제를 구축했고, 하부 조직이나 선전원을 선전대상에 따라 분류 배치하였다. 실제 선전활동에 있어 공연예술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소대로 편성되어 지방을 순회할 때는 기동성에 유리한 음악과 무용이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문화예술가들의 동원이...
[학술논문] 중국인에 의한 한국전쟁 기억화 -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시기 항미원조(抗美援朝)영화 연구
이 글은 1972년 3월 22일 <해방일보(解放日报)>에 실린 광고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상하이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광고였는데, 당시 유행하던 모범극과 ‘항미원조’영화 광고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72년을 전후로 ‘항미원조(抗美援朝)’영화의 소환은 국제적 고립으로부터의 탈주를 위한 선제적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중소 국경분쟁이 구체화 되면서 기존 위협국인 미국에 더하여 소련에 대한 경계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국제적 고립상태에 처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선택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고, 이를 위해서 중국과 사회주의 특수관계를 맺은 국가들, 특히 미국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국익차원에서 대미 관계 개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