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북한의 남한 점령기 민간인 학살― 한국정부와 미군(KWC) 조사기록의 비교를 중심으로 ―
The main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analyze on the South Korean Civilian Massacre by the North Korean Army and the left wings during the North Korean Occupation of South Korea. This paper is aimed to put a valuation on the problematic issues in War Crimes Division in Korea(KWC). This study was the reference of conducted with following documents: NARA, RG 153 Records of the Office of the Judge Advocate
[학술논문] 朝鮮後期 正祖代의 政局과 市廛政策 -貢市人詢瘼을 중심으로
...하나였던 貢市人詢瘼 중 市廛상인들의 폐막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서울 市廛[=京市]과 송파·누원·수원 場市[=鄕市]간의 문제, 금난전권 행사 주체와 범위문제, 통공의 시행과 釐正의 문제를 주목하였다. 영조 후반에서 정조 초의 시기에는 영조와 왕세자를 중심으로 한 송파 장시의 폐지와 유지 논의가 있었고, 송파 場市[=鄕市]는 유지되었다. 이후 왕세자는 금난전권을 축소·완화하려 했으나, ‘임오화변’이 발발하였다. 영조 40년(1764)과 44년(1768)에는 북한당과 남한당에 의해 ‘갑신통공’·‘무자통공’이 시행되었다. 이후 ‘갑신통공’ 위주의 시전정책이 시행되었고, 정조...
[학술논문] 북한산성의 승영사찰僧營寺刹 ― 사찰의 역할과 운영을 중심으로
...중흥사에는 승대장僧大將이 승군 전체를 지휘하도록 했고, 각 사찰에는 승장僧將‧수승首僧‧의승義僧 등을 두었다. 산성의 방어를 위해서 3군영의 유영留營이 설치되었지만, 각 사찰은 성문에 인접하여 산성방어의 최일선에서 그 역할을 한 것이다. 산성방어의 주역이었던 승군 중 대다수인 의승義僧(정원 350명)은 교대로 근무를 서는 의승상번제義僧上番制로 운영되었고, 이것이 영조 때 방번전防番錢을 납부하는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로 전환되었다. 승군제의 변화와 함께 승영사찰의 변화도 불가피하였다. 하지만 사찰 본래의 목적이 산성의 방위였기 때문에 그대로 존속하였지만 승군의 폐지(1894)를 전후해 대부분 폐사되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상운사‧태고사‧진국사(노적사)‧국녕사 등이 명맥을 잇고 있으며 중흥사와 서암사는 복원 중에 있다.
[학술논문] 인조 舊 長陵의 위치비정과 석물에 관한 고찰
...초장지를 확인한 임금은 정조가 유일하다. 세종의 英陵과 효종의 寧陵에 후대의 왕인 순조의 仁陵과 영조 元陵의 능역이 조성된 것처럼 구릉 역시도 왕릉과 동일하게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왕의 초장지를 확인하기 어려운 이유는 조선 초기 세종과 장경왕후의 예에서 볼 때 구석물을 인근의 屛處에 묻어 두었고, 중기 이후에는 석물의 재사용을 해 왔기 때문에 그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인조 長陵의 경우는 인렬왕후가 1635년 먼저 승하하자 왕의 壽陵地로 그 옆을 정했다가 인조가 1649년 승하한 후 쌍릉으로 조영된 왕릉이다. 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는 당시의 능역조성과정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전한다. 그러나 영조 7년 천릉시 대부분의 석물을 파주 운천리에서 파주 교하읍치(現 갈현리)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그간...
[학술논문] 일제강점 초기 연융대 지역의 기능 변화와 행정구역 변동
...연융대 지역은 彰義門 밖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의 여러 산봉우리와 한양도성의 主脈인 백악과 인왕산에 둘러싸여 있다. 이들 산줄기와 蕩春臺城이 연융대 지역의 경계를 이룬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부암동, 신영동, 평창동, 홍지동, 구기동 일대에 해당한다. 연융대는 조선초 임금의 유흥을 위해 조성된 蕩春臺를 개칭한 것이다. 1754년(영조 30) 9월에 총융청이 이곳으로 출진하면서 이름을 바꾸고 도성의 외곽 군사기지로서 기능을 갖추었다. 이후 총융청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장려 정책과 모민 정책이 시행되면서 인구가 유입되었다. 연융대 지역의 거주민은 개간에 참여한 농민이거나, 군수물자 생산에 참여하는 공인, 총융청과 탕춘대성 및 북한산성을 수비하는 군사 등 총융청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