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냉전체제 형성기(1945~1948) 中華民國의 한국인식 - 국민당 언론의 한국 기사를 중심으로 -
본 연구는 종전이후 중화민국의 주요 신문인 『대공보』‧『신보』‧『중앙일보』의 한국관련 보도를 통해 냉전초기 한‧중 관계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전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미·소 주도의 냉전체제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전승국인 중국은 국공내전에 휩싸여 대외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고, 동아시아 질서재편의 주체가 되지 못하였다. 전후 한국문제처리에서 중국은 미·소의 주도로 진행된 국제논의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단지 역사적 현실적으로 긴밀한 연대와 외교적 후견역할을 통한 도의적 책임론을 내세워 한국문제에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자국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의 후원과 협력에 의해 제한적 역할만 가능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줄곧 주장해온 4개국 협의에 의한 한국독립과 미·소 군대의 철수는
[학술논문] 제1・2차 國共合作期의 한・중 연대활동 -黃埔軍官學校 인맥을 중심으로-
...추구하였거나, 중국공산당에 참여하여 무장투쟁 전개하였거나, 모두 黃埔군관학교에서 배운 군사기술과 정치사상, 인맥이 그들 활동에 큰 무기가 되었다. 1937년 7・7사변으로 중일전쟁이 폭발함으로써 제2차 國共合作이 이루어지자, 한중간 공개 항일연합전선이 결성되고 韓人 독립운동가들도 좌・우파가 연합하였다. 김원봉과 의열단 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 인맥을 배경으로 蔣介石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건할 수 있었다. 또한 황포군관학교시기 周恩來를 매개로한 韓人청년들과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이후 1930년대 만주지역 韓人의 공산주의운동 및 延安 항일근거지 활동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두 번째 국공합작도 결렬되면서, 중국의 국민당・공산당과 연대한 한인 혁명가들은 중국에서 민족협동전선을 수립하기 어려웠을 뿐만...
[학술논문] 미·소 군정기 중국공산당 언론의 남한인식 - 1946~1948년 人民日報 기사를 중심으로 -
...보도하면서 소련의인내와 양보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의해 결렬된 것처럼 주장하였다. 또한 인민일보는 미·소 군정하의 남북한실상을 암흑과 광명으로 비교하면서 소련식 사회주의의 성과라고 선전하였다. 미·소는 처음부터 한국의 통일, 독립을 목표로 했다기보다 자기세력을 강화시키는데 유리한 명분 축적에급급하였다. 이에 대해 인민일보는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이 그동안 蔣介石을 주축으로 對蘇防共基地를 구축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남한 및 일본으로 전환했다고 보았다. 그 후 인민일보는 미군정의 좌익탄압에 대한 비판기사를 쏟아 내며, 북한의 소비에트화와 남한의 좌익운동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보도하였다. 한국독립과 관련하여 미소공위가 무산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곧바로 유엔에 상정하였다. 이에 맞서 소련은 미·소 양군의 동시철수와 남북한...
[학술논문] 태평양전쟁 시기 중국국민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 1944년 미국 부통령 訪中 前後 임시정부의 對美 접근 시도와 국민정부의 대응 -
The visit of U.S. Vice President Henry A. Wallace to Chongqing in late June 1944 further accelerated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s approach to the United States, which had taken the lead in the Pacific War since the U.S. participation in December 1941. The provisional government’s request for a meeting with Wallace was not accepted due to a tight schedule. However, the Provisional Govern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