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제1・2차 國共合作期의 한・중 연대활동 -黃埔軍官學校 인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도 좌・우파가 연합하였다. 김원봉과 의열단 단원들은 황포군관학교 인맥을 배경으로 蔣介石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건할 수 있었다. 또한 황포군관학교시기 周恩來를 매개로한 韓人청년들과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이후 1930년대 만주지역 韓人의 공산주의운동 및 延安 항일근거지 활동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두 번째 국공합작도 결렬되면서, 중국의 국민당・공산당과 연대한 한인 혁명가들은 중국에서 민족협동전선을 수립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공산당 측으로 나누어졌다. 黃埔군관학교 출신 韓人혁명가들은 한중 연대활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과 결렬을 반복적으로 경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공 양측으로 갈라진 韓人들의 황포군관학교 인맥은, 1945년 해방 후 분단을 겪으면서 남북한으로 갈라지게...
[학술논문] 安敬根이 걸어 간 한국근현대사 -독립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安敬根은 23살 때인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으로 망명하여, 1921년 봄 上海로 이동하여 이듬해 4월 雲南講武學校에 입교하였다. 1924년 상해로 귀환하였으나, 다시 만주로 가서 正義府 활동에 참가하였다. 1926년 11월에서 1927년 8월까지 黃埔軍官學校에서 5기생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중국정세의 변화에 맞닥뜨려 교관 직을 사임하고 상해로 귀환하였다. 괄목할만한 군사활동 이력의 소유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32년 4월 虹口義擧를 계기로 성립된 한ㆍ중 연대를 배경으로, 그와 金九의 인연도 본격화되었다. 그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洛陽分校 내 韓人特別班과 韓國特務隊獨立軍學生訓練所로 짜여진 김구 항일특무조직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김구의 신변경호뿐만 아니라, 天津·上海 등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