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한국전쟁 초기 중국군 조기파병을 둘러싼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의 동상이몽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관한 기존 연구는, 미국이 38선을 돌파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참전도 없었을 것이란 주장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중국과 러시아의 당안 자료들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수세에 몰려있던 7~8월에 이미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중국군 파병을 적극 희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미군의 38선 돌파 후 중국군 참전”이라는 스탈린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혁명성과 보존, 대만문제 해결, 북한에 대한 영향력 확보 등을 위해 조기파병을 희망했고, 그 뜻을 북한과 소련에 전달했다. 마오쩌둥은 중국군 조기파병을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낼 수 있는 수단으로 보았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 이후 동요하기 시작했고, 38선 돌파 이후에는 참전 불가를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하기도
[학술논문] 제2의 해방: 북한 자주화와 1956- 57년의 중국-북한관계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 이후 중국의 외교정책은, 경제건설을 위한 우호적인 국제환경의 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정책 또한 이러한 중국외교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전쟁의 재발방지’와 ‘조선반도의 안정적인 현상유지’는 중국의 대북정책의 목표였으며, 이의 실현을 위하여 중국은 북한 내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1956년 9월, ‘8월 종파사건’에 대한 중소의 공동개입은, 중•조 간의 비대칭 관계의 상징이었다. 1956년 11월 초 김일성과 비슷한 정치적 압력을 받고 있던 헝가리에 대한 소련군의 무력개입과 뒤이은 헝가리 임레나지(Imre Nagy) 정권의 붕괴는, 김일성의 불안감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이에
[학술논문]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원인에 관해서,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에 중국이 참전하였으며, 중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파병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이 서방학계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국계 학자들은 마오쩌둥이 참전에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반대로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파병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 공개된 중국의 당안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 마오쩌둥이 한국전쟁개시에는 동의하였지만, ‘미군이 개입할 경우에도 38선을 넘지 않는다면 중국은 파병하지 않는다’며 파병에 소극적이었고, 이 태도를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제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발표 이후까지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엔군의 전면적인 참전 이후 더욱 악화된
[학술논문]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원인 연구 : “국방선(國防線)”의 무혈확장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제7함대 대만해협 파견 발표는, 신생(新生)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흔들었다. 이에 전쟁이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한국전쟁 초기,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파병하겠다는 스탈린과의 약속을 뒤로 하고, 조기 파병을 적극 희망하였지만, 스탈린의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출병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출병을 보류하고 이를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하기까지 하였다. 1950년 10월 5일, 중국은 안보위협과 스탈린의 압력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하였으나, 스탈린이 즉각적인 공중엄호 및 무기제공에 난색을 표하자 10월 12일에 참전불가를 다시 결정하고 이를 스탈린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즉 10월
[학술논문] [서 평] 모택동 시대의 북한-중국 관계에 대한 중화주의적 해석 - 션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김민철․김규범 옮김, 『최후의 천조(天朝):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 (선인,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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