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원인에 관해서,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에 중국이 참전하였으며, 중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파병에 소극적이었다는 주장이 서방학계에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국계 학자들은 마오쩌둥이 참전에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으며, 반대로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파병에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최근 공개된 중국의 당안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 마오쩌둥이 한국전쟁개시에는 동의하였지만, ‘미군이 개입할 경우에도 38선을 넘지 않는다면 중국은 파병하지 않는다’며 파병에 소극적이었고, 이 태도를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제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발표 이후까지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엔군의 전면적인 참전 이후 더욱 악화된
[학술논문]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원인 연구 : “국방선(國防線)”의 무혈확장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제7함대 대만해협 파견 발표는, 신생(新生)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흔들었다. 이에 전쟁이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되던 한국전쟁 초기, 마오쩌둥은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파병하겠다는 스탈린과의 약속을 뒤로 하고, 조기 파병을 적극 희망하였지만, 스탈린의 반대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출병 결심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출병을 보류하고 이를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하기까지 하였다. 1950년 10월 5일, 중국은 안보위협과 스탈린의 압력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하였으나, 스탈린이 즉각적인 공중엄호 및 무기제공에 난색을 표하자 10월 12일에 참전불가를 다시 결정하고 이를 스탈린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즉 10월
[학술논문] [서 평] 모택동 시대의 북한-중국 관계에 대한 중화주의적 해석 - 션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김민철․김규범 옮김, 『최후의 천조(天朝): 모택동 김일성 시대의 중국과 북한』 (선인, 2017) -
서평
[학술논문] 휴전협상에서 북ㆍ중ㆍ소 3국의 태도 변화 및 결과
1951년 5월 말 제5차 전역 직후 북중연합군이 전면적인 패배 위험에 처하게 되자, 마오쩌둥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것을 결정하였다. 마오쩌둥은 38선 군사분계선과 외국군 철군을 휴전협상 조건으로 김일성에게 제안하였고, 상대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대규모 공격을 개시할 것도 약속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동의하여 함께 스탈린 설득에 나섰으며, 스탈린은 대규모 공세를 개시할 수 있는 재정비 시간을 벌기 위해 휴전회담 개시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휴전회담은 군사분계선 획정과 외국군 철군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처음부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중국은 조속한 타결을 위해 양보를 주장하였지만, 북한은 원래의 조건을 고수하려 하였다. 이후 유엔군의 공세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김일성이 38선 군사분계선 주장을 철회하고
[학술논문] 동북 조선인의 조선족화 과정(1945-1950) — 동북 조선족의 형성과 배경 —
When Japan surrendered in August 1945, both the Chinese Nationalist government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CCP) considered Korean people in China foreigners rather than an ethnic minority. As the CCP’s strategy toward Northeast China changed from its sole occupation to guerrilla warfare, however, the CCP began to recognize Koreans in the region as an ethnic minority and allocated land wh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