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해방 후 평양 감리교인의 월남과 교회 재건
평양은 기독교가 크게 성행한 북한 지역 선교의 중심지였다. 감리교는 선교초기부터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후 전도사업과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통해 그 기반을 넓히면서 성공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 친일교단의 횡포로 신앙이 훼손되고 교회가 폐쇄되는 등 심각한 시련과 위기를 당했다. 해방 이후 이 같은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 재건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에서는 교회 재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회 재건을 위한 교회의 노력이 시작되기도 전에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주하고 친소적인 북한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 지역의 교회는 북한 정권과 갈등, 대립하게 되고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의 변화로 인해 대다수의 북한 지역의 교역자와 교인들은
[학술논문] 해방 이후 평양에 설립된 성화신학교의 역사
...1950년까지 5년간 존속하였던 성화신학교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려는 데 있다. 감리교회의 교리적 특색인 ‘성화’를 차용한 성화신학교는 1946년 6월 평양 수옥리에 성화여학교의 교장인 배덕영의 주도하에 태동하였는데, 처음 학제는 예과와 본과였다. 이듬해인 1947년 개최한 기독교조선감리회 서부연회에서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하에 서부연회의 잠정적인 신학교로 인준 받은 직후 성화신학교의 학제는 야간부와 고등성경학과(약칭 고성과)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학제가 추가되면서 성화신학교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북한 지역에서 반공적인 신학교로서의 역할을 확연하게 수행하였다. 특히 고성과는 공산주의 교육, 유물주의 교육을 싫어한 가운데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한 1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