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거제도포로수용소의 9ㆍ17폭동 연구
6ㆍ25전쟁 기간 북한군 포로는 14만 명정도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꾸자 급증한 포로를 수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부산에 포로수용소가 마련되었으나 보안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이듬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옮겼다. 포로는 인민군, 중국군 등 원 소속에 따라 대단위로 수용되어 이념 갈등의 소지가 있었다. 수용소 운영이 포로들의 자치로 이루어져 단위 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의 주도권 다툼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친공과 반공으로 갈리게 되었다. 1951년 7월의 정전회담의 개시는 포로수용소를 이념 갈등의 장으로 만들었다. 수용소를 장악하기 위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의 주도권 다툼은 유혈사태화 되었는데 ‘9ㆍ17폭동’은 그 중 하나였다. 구술 증언을 통해 85수용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