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여순사건 초기 진압 작전의 정치성과 언론 보도
여순사건 초기 진압 작전의 최우선 목표는 봉기군 주력부대 섬멸이 아닌 여수와 순천, 두 도시를 신속히 탈환하여 "정신적, 정치적 승리"를 쟁취하고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 진압 작전은 "빨갱이 소탕"이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한 민간인 학살을 수반했고, 지리산 빨치산 문제를 초래했다. 여순사건 초기 진압 작전에 대해 한국 언론은 정부의 언론 통제 아래 반공 담론의 확산에 보도의 초점을 맞추었고, 미국 언론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틀에서 보도했으며, 북한 언론은 자신들의 체제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였다. 이 글은 그간 여순사건 관련 연구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초기 진압 작전의 정치적 성격을 규명하고 한국, 미국, 북한의 언론 보도를...
[학술논문] 지리산권 빨치산의 형성과 활동
...크고 작은 소요를 둘러싼 갈등과 억압이 치안문제 차원에서 전개되었다면, 1948년 하반기부터는 정부 수립과 여순사건을 계기로 국가에 대한 ‘반란’과 ‘토벌’이 첨예하게 펼쳐졌다. 1948년 10월 이전에도 산악 지역에서 남로당의 ‘야산대’가 존재했지만 빨치산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간적 배경은 지리산 일대였다. 지리산이 빨치산들의 유일한 활동 지역은 아니었으나 매우 유력한 활동의 근거지였다. 최종적으로 지리산은 모든 빨치산 활동이 종료된 곳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조직과 활동은 크게 세 국면의 극적 전환을 겪었다. 여순사건 이후 최초의 빨치산 활동은 지역적 요인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유격투쟁은 1949년 하반기부터 외부적...
[학술논문] 한국전쟁 전후 반공문화 형성과 그 의미 -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이 연구는 선행연구를 토대로 하여 한국전쟁 전후(1948~1953) 반공영화를 분석함으로써 일반 생활양식으로 자리매김한 반공문화의 기원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승만 정권은 분단체제 속에서 맹목적 반공주의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첫째가 법적‧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거나 마련하는 것이었다. 국가 기구를 통한 물리적 법제를 통한 억압과 감시라는 배제 방식이 상층부로부터의 ‘반공주의’ 체제구축이었다면, 아래로부터 반공주의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즉, 일상생활에서도 반공주의 투철한 의식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 방위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에 적절하게 활용된 것이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작품이다. 특히, 반공영화는 공산주의 만행과 잔혹상을 폭로하고
[학술논문] 해방 10년, 음악계의 구성과 존재 방식
...촉구하며 1946년 삼일절 기념음악회를 공동으로 주최했고『 임시중등음악교본』과 해방기념음악회, 전국음악경연대회 등을 통해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1947년을분기점으로 세계냉전 국면으로의 전환과 그 해, 8월부터 미군정에 의해좌익활동이 전면금지되면서 좌익예술가들은 지하로 숨게 된다. 1948년은 단정을 둘러싼 내부냉전이 격렬하게 일어나면서 제주항쟁과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냉전의 논리를 남한사회 안으로 내면화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문화예술인 사이의 공모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은 90일간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이 기간동안‘문련’ 산하의 예술단체가 조직되어 예술가들이 북한군에 부역하였다. 서울 수복 후 ‘문총’은 부역자 처벌과 종군문화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