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朝鮮人民歷史講座」(1950)과 歷史敎育-樂浪郡의 위치비정을 중심으로-
...또 오랫동안 중국의 식민지 내지는 그와 비슷한 처지였다는 歷史像을 교육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조선인민력사강좌」에서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하여 이를 부정하였다. 1950년 전후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종래의 ‘낙랑평양설’을 부정하고, 낙랑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에 비정하는 설이 대두하였다. ‘낙랑요동설’은 논쟁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력사강좌」에 채택되는 등 정설처럼 되었다. 이는 새로운 국가의 새 서울인 평양이 과거 ‘식민지’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근대 민족주의의 ‘
영토순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