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사할린한인 귀환문제에 대한 전후 일본정부의 대응
패전 후 일본정부는 외교권이 박탈됨에 따라 구 일본제국 내 일본인·비일본인의 송환은 미소 점령당국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소련이 일체의 외교교섭을 거부한 가운데 일본정부는 연합국총사령부를 통해 1946년 12월 ‘미소간 협정’을 이끌어 냄으로써 억류 일본인의 국내 귀환을 실현시켰다. 그리고 외교권을 되찾은 1950년대 중반에는 ‘일소공동선언’을 통해 잔류 포로, 한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 및 가족의 귀환이 실현됨으로써 해묵은 억류자 귀환문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상기 2번의 귀환교섭 과정에서 한인의 귀환은 여전히 미제 사안으로 남게 되었다. 이것은 국적 등의 명분으로 포장된 혈통에 따른 차별적인 귀환교섭, 그리고 재일동포와 사할린 한인 등 1952년
[학술논문] 전시의 극장, 선동과 공감의 매개체 - 한국 전쟁 시기 북한의 공연활동을 중심으로 -
...인지하고 활용하였다. 전쟁 초기 대규모 대회와 공연들은 검증된 레퍼토리, 친근한 가요를 통해 북한의 문화를 선전하는 동시에 동원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공연은 극장 이외에도 민주선전실, 학교, 병원, 군부대 등에서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동연예단과 민주선전실의 공연은 전쟁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단막극과 전시가요 위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군인의 애국적인 면모, 전쟁 책임 소재, 후방 인민의 자세 등의 변화하는 정책을 반복 주입하였다. 또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주의 국가에 공연단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은 극장과 공연을 감성을 통한 선동이라는 이중 전략의 매개체로 활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공연형태들은 1950~60년대 북한 공연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학술논문] ‘히로시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의 결성과 원수폭 금지운동
...조직된 조피협의결성 배경에는 1950~1970년대를 거치면서 보다 열악해진 조선인의 삶의 변화와일본 사회의 강한 배외주의, 그리고 1955년 이후 히로시마에서 고조된 원수폭 금지운동과 1960~1970년대 손진두 수첩재판을 통해 각성된 일본 시민단체의 식민지배와 전쟁 책임에 대한 가해성의 자각이 있었다. 조피협은 결성 후 피폭자 구조와 핵무기 폐기라는 원수폭 금지운동의 목표를 공유하며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전쟁 책임을 물으며 조선인피폭자의 실태를 밝혀 조선인 피폭자 운동을 처음으로 전 세계 반핵·평화운동 안에 자리매김했다. 또한 일본과 국교가 없다는 이유에서 어떠한 피폭자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북한 피폭자의 원호 문제까지 포괄하며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조피협의...
[학술논문] 한중수교 교섭과정 연구
...않았다. 둘째, 한중수교에 이르는 상황에서 1985년 어뢰정 사건의 외교적 해결과정은 한중의 외교정책의 전환과 맞물려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셋째, 중화민국과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 철저한 보안과 비밀 속에서 진행되었고, 중국이 북한에 먼저 통보하고 설득한 이후, 한국이 중화민국을 설득하는 단계적 과정을 거쳤다. 넷째, 수교협상 과정에서 이른바 비선(秘線)조직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다섯째, 한국은 한국-중화민국의 단교 방식과 한국전쟁의 책임 문제 제기를 내부적으로 검토했으나, 실제로는 쟁점화하지 않았고 이면합의도 없었다. 이러한 한중수교 협상의 원만한 처리과정은 한중관계가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협상과정이 비교적 투명했기 때문에 한소수교 때와는 달리 양국의 국내정치의 쟁점이 발생하지 않았다.
[학술논문] 한국전쟁을 보는 두가지 시선: 냉전시대 동·서독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한국전쟁 관련 내용 분석
...서술에서 한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청일전쟁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출판 시기를 막론하고 서독 역사교과서는 한국에 관련된 내용 중에서 ‘한국전쟁(Koreakrieg)’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석 대상인 1951년부터 2002년까지 출간된 187권의 서독 역사교과서는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따라서 전쟁의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는 입장이다. 역사교과서는 자라나는 2세들에게 객관적 역사사실을 가르치고, 바람직한 역사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날 동·서독과 남·북한의 역사교육은 냉전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동맹국과의 단결을 중시하는 정치교육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서독의 역사교과서 또한 그러한 한계를...